값싼 은혜

본 훼퍼는 “회개 없는 용서. 삶을 바꾸지 않고 용서만 가르치는 것” 을 값싼 은혜라 말했다.

 

은혜가 풍성한 이 나라.

왜 값싼 신앙이 판을 치는지 알 수 있다.

 

숭고한 죽음

좁은 바위틈에 온몸을 밀어 넣고 죽은 산양 주검.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찾아든 곳인 듯 하다.
어둠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으며 무슨 생각했을까?
조심스럽게 수습하며 늙은 산양이 살아온 삶을 본다.
생명의 소리로 가득한 봄날 주검으로 삶을 생각한다.
https://www.facebook.com/goral217?fref=photo

박그림님 페이스북에서 이 사진을 보고 마음속으로부터 울려퍼지는 감동을 가눌 길이 없었다. 두고 두고 마음속에 잔향이 사라지지 않는 감동. 죽음 자체가 감동스럽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 나는 자신의 마지막을 제자리를 찾아 돌아온 이 산양의 최후에 감동을 느낀 것.

숲속에서 태어나 숲속을 거닐고 숲속 가장 깊은 곳에 자기 자신을 묻었다. 운명에 순응하고 그 운명의 거룩함을 아는 삶. 살아있다는 존엄성을 죽은 후에도 잃지 않았다. 그래 이 죽음은 숭고한 죽음.

다가오는 죽음을 느끼고 산양을 자기의 마지막 거처를 찾아 헤메다 자기 한몸 뉘일 알맞은 이 곳을 찾아왔겠지. 자기의 소임을 다하고 다가오는 죽음을 아름답게 맞이하였고, 그 모습이 이렇게 숭고한 모습으로 남았다. 나도 이렇게 숭고하게 죽음을 맞이 할 수 있을까…

미물이라 본능을 좇아 구석진 바위굴틈에 기어들어간거라 폄하할 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생각하겠다면 그대로 생각하는게 편하겠지. 그런 사람은 평생을 그러고 사는거야. 평생을 그러고 살다 삶의 숭고함이 뭔지도 모르고 죽겠지.

생명이 기지개를 펴는 봄 날에 늙은 생명이 바위속에서 바위처럼 자연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운명에 순응한 아름다운 삶. 이루 말할 수 없는 마음속의 감동을 준다.

[퍼온글] 누가 믿음이 있는 사람인가

글을 읽고 밀려오는 나의 믿음에 대한 회의.

나는 지금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가…

 

오강남 교수의 아하!

믿음이 뭔가? ‘믿음’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누가 말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목사님이나 스님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하는 말, 특히 성경이나 불경 같은 경전에 나온 말이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라 여긴다. 개인의 독립적 사고를 희생하면서라도 ‘무조건 믿으라’ ‘덮어놓고 믿으라’고 할 때의 믿음이다. 라틴어로 ‘assensus’, 영어로 assent, 곧 ‘승인’으로서의 믿음이다. 이런 것도 물론 믿음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믿음은 자기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것에 의존한다는 뜻에서 ‘한 다리 건넌 앎’(secondhand knowledge)이라 할 수 있다.

몇 가지 다른 종류의 믿음도 있다. 한 가지만 더 말하면, 신이라고 할까, 도(道)라고 할까, 우주의 근본 원리라고 할까, 그런 궁극적 진리에 우리를 ‘턱 맡김’으로서의 믿음이다. 라틴어로 ‘fiduncia’, 영어로 trust. 아기가 아버지를 믿고 높은 책상에서 아버지에게 껑충 뛰어내리는 것. 천 길 깊은 바닷물에서 허우적거리는 대신 물의 부력을 믿고 나를 턱 맡기는 것이다. 이런 것이 예수님이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할 때의 믿음이다.

그리스도교 성경 히브리서 11장, 이른바 ‘믿음 장’ 첫 구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정의하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곤란한 말이다. 다행히 이 어려운 말에 이어 구체적으로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고 그들이 왜 믿음의 사람인가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중에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교인들이 하나같이 ‘믿음의 조상’이라 받드는 아브라함을 두고 그 믿음의 특징이 바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간 것”(8절)이라고 했다.

아브라함만이 아니다. 우리가 잘 아는 모세도 “믿음으로…이집트를 떠났다”(27절)고 했다. 거기 믿음의 사람으로 지칭된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모두 신의 약속을 믿고 모험을 감행한 사람들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히브리서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처럼 신앙의 모험을 감행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정신적 영웅들의 특징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 세계’에 안주하기를 거절하고 ‘알지 못하는 것’(the Unknown)을 향해 집을 떠나는 것이다.

미국 성공회 주교 존 셸비 스퐁 신부는 어느 인터뷰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어떤 명제나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신이 내 앞길에 함께한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알지 못하는 곳을 향해 앞으로 한 발짝을 내딛는 용기”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불신이란 이와 반대로 옛날부터 믿어오던 것에 그대로 매달려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는 비겁함이 아닌가. 혹시 지금 내가 믿는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무조건 그대로 믿는 것을 믿음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다면, 과연 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인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오강남 경계너머 아하!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