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봉순이 편을 봤다.
어릴 적 집 주변 논에는 미꾸라지가 천지였는데,
지금은 귀해서 돈주고도 못 사먹는 세상이 되었다.
농약을 치지 않고 재배하는 농민들의 그 수고를 어찌 다 쉽게 말 할 수 있으랴.
그 숭고한 수고 덕분에 논에서 되살아나는 생명들을 보니
눈물이 흘려내렸다.
생명이라는 것은 절로 주어진 것도 아니고
날로 사람이 사람답기 어려워지는 이 세상을 되돌리는 그 숭고한 희생이 있어서
생명이 살 수 있는 것이고
그 생명들이 우리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준다.
우리가 논에 사는 미꾸라지 한마리를 물건이 아닌 생명으로 생각할 때
돈이 줄 수 없는 위안을 거기서 받을 수 있다.
카테고리 보관물: 기억 # 1
오랜만. 일상..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중
오늘 퇴근길에 비가 시원하게 내려주셨는데,
자전거는 내리는 빗물에 세척이라도 하지만,
초고도근시 안경잡이인 나는 눈 뜨기도 힘듬.
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니
보이지 않은 풍경들이 보인다.
지나가는 학생들의 얼굴도 군중이 아닌 한명 한명의 학생으로 보인다.
어려서 소중한지 모르는 것들이 많겠지만,
그래서 얼마나 아름다운 소년소녀들인가.
모두 다 아름다운 청춘들이다.
이제는 웃는 일보다
인상쓰는 일이 많은 나이가 되어버린 나에게
뭐가 그지 좋아서 매번 웃어대는지 알 수 없는 여고생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슈베르트 마지막 소나타를 듣는 비오는 밤.
이 비에 가뭄은 가시고
만물은 더욱 피어날거다.
그리고 봉순이 둥지가 어서 완성되어
봉순이가 봉화에 터를 잡았으면 좋겠다.
요즘은 잘 때에도 봉순이 생각이 난다.
봉화에가서 보고 싶다.
용서
영화 밀양에는 하느님이 용서했다 말 한마디로 편하게 사는 사람이 나온다. 나는 이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용서는 당사자와 하느님 사이의 문제인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용서는 상대방이 용서해주어야 하는 것.
하느님에게 죄를 지은 것과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것의 가장 큰 차이는 절대적 용서의 대상과 용서를 인정해주는 대상의 차이다. 진정한 회개가 따를 때 하느님이 용서하지 못하는 죄는 없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럼 하느님이 용서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용서받은 것인가? 나는 용서받기 위해서는 용서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하느님이 용서하든 사람이 용서하든의 문제가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삶에 대한 문제다.
믿음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 믿음이다. 때문에 기독교 신앙안에서의 용서는 삶이 수반되어야 한다. 삶이 수반되지 않는 믿음과 용서가 다 무슨 소용인가. 그것은 거짓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남은 쉽게 용서하지 못하면서 나는 쉽게 용서받는다. 싸구려 기독교가 낳은 이 시대의 비극이다. 용서라는 거룩한 행위가 면피용으로 둔갑해버리는 그 순간 기독교라는 이 유서 깊은 종교는 싸구려 사이비 종교가 되어 버린다. 그것은 용서라는 이름의 면죄부를 남발하며 싸구려 삶을 살아가는 우리 믿음의 모습이다.
하느님이 용서하셨는데 너가 뭔데? 이런 싸구려 답변을 듣기 위해서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싸구려 믿음을 믿음이라 착각하는 현실. 교회가 병들어가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믿음이 싸구려인데, 어떻게 교회가 싸구려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