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은 여러 기준중 하나일 뿐…

루왁 커피 기사를 보고 우울한 기분. 커피가 뭐라고 저따위로 커피를 만들어내는지 모르겠다. 맛이 좋은면 다 인가? 얼마전 달걀 파동 때 황교익씨가 자기는 좋은 달걀의 선택 기준이 맛이라고 했다. 이 또한 우울한 이야기지.

미국의 저명한 의사가 한 이야기중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다. 혀가 몸에서 주인 노릇을 하면 몸이 망가진다. 못 먹어서 병이 생기는 시대가 지나, 이제는 먹어서 병이 되는 시대. 이 말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시대. 동네 마트만 가도 이제 먹을 것이 산처럼 쌓여있다. 요즘 아이들이 먹을 것을 우습게 알고 먹다 버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현대인은 풍요라는 축복을 받는 동시에 질병이라는 저주도 동시에 받았다. 당뇨 환자가 이렇게 많은 시절이 우리나라를 넘어 인류 역사상 과연 존재한 적이 있었나 싶다.

맛은 결정의 한 기준일 뿐, 전부가 아니다. 맛이 전부라는 것은 무지의 소산이다. 그 맛을 위해서 마음 껏 농약치고 마음껏 살충제 뿌리고 마음껏 항생제 남용해도 되는 것일까. 다 먹지도 못할만큼 생산해서 버리는 것이 풍요인가?

좋은 음식을 먹는 것보다 바른 음식이 먹는 것이 건강을 유지하는 세상이다. 적게 먹고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잘 쉬고. 이렇게 간단하고 쉬운데 어렵다. 현대사회의 모순. 풍요가 넘치는데 병도 함께 넘쳐나는 세상.

미래는 암이 아니라 당뇨병의 시대가 될 것이다.

 

 

 

 

이덕무, 파스칼

자기전 이덕무의 글 하나 파스칼의 팡세 하나 씩 읽고 잔다. 자연스럽게 이덕무가 바라보는 세계와 파스칼이 바라보는 세계를 비교하게 된다.  이덕무 1741년 ~ 1793년,  파스칼 1623년 ~ 1662년. 이덕무가 한참이나 후대 사람.

이덕무는 당대 걸어다니는 백화사전으로 불려도 무방할만큼, 온갖 것에 관심이 많았고 당대 최고의 독서량을 자랑했던 사람. 그 시절 이덕무는 조선이라는 세계가 추구했던 이상적 유교 사회와 관점 자체가 달랐다. 그도 유학자였고 그 한계를 벗어나려 한 적은 없지만, 그는 당대의 주류가 받아들일 수 없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존재였다.

그런 이덕무도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관점에서 파스칼과 비교하면 우울해진다. 동서양의 격차는 청나라가 들어서기도 전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파스칼의 인간과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은 지금 봐도 무서울 정도다. 이렇게 냉철하고 합리적인 인간이 어떻게 그런 신앙을 가질 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될 지경.

파스칼의 팡세는 합리와 신앙의 영역에서 괴로워하는 지금 크리스찬에게 좋은 책이다. 얼치기 창조 과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권한다. 과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파스칼과 크리스찬 파스칼은 둘이 아니다.

 

주거 형태가 소비에 미치는 영향…

난 지금 집에 살기 전까지 좋은 집에서 살아 본 적이 없다. 겨울이면 난방이 안되어서 그냥 난방을 안하고 살았고 씻는 곳이 밖에 있어서 씻는데 애먹고… 그래서 그런지 난 사는 곳에 대한 편견이 없다. 내장 산속에 살 때는 전기 수도도 없는데서 살았다. 아침에 물 길어와 씻고 출근하고 그랬다. 그렇게 살다 내가 지금의 집으로 오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그랜드 피아노를 사는 것이었다.

내 경험도 그렇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어느 곳에 사느냐가 어떻게 소비하느냐를 결정한다. 주거가 안정되지 않으면 소비도 진작되지 않는다. 또 주거비용이 지나치게 높으면 다른 소비를 억제한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높은 주거비용으로 부유층은 일방적으로 그 혜택을 입었고, 저소득층은 그 주거비용을 감당하기에 급급했고, 감당하지 못하는 계층은 외곽으로 추방아닌 추방을 당했다.

정부가 주거안정에 신경을 쓰면 시장경제를 반한다고 말한다. 이게 이 나라의 아름다운 전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