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중반에서… 교육과 사생활 (1960,70년대)

미켈란젤리는 교육에 대단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미 열 한살 때부터 스스로 ‘모범적’ 이라고 생각하는 연주방식을 시범해 보이는 방법으로 성인 연주가를 지도하곤 하였다. 첫 공식 교수직은 1938년 볼로냐 음악원이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베니스로 옮겼고 건강상의 이유로 이탈리아령 남티롤의 볼차노로 옮긴 그는 1959년까지 그곳에서 재임했다. 60년대 이후부터는 토리노와 루가노 등지에서 정기적으로 마스터클래스를 열었다. 그의 제자들중 마우리치오 폴리니,마르타 아르헤리치,아담 하라세비치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폴리니는 그의 인터뷰에서 미켈란젤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 하였다.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20세기 최대의 피아니스트이며 이탈리아가 낳은 최고의 연주자입니다.”

“그를 접한 것은 아주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1961년에 몇 번인가 레슨을 받은 게 전부지만 그것이 내가 음악가로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요. 나를 가르쳐 준 그에게 여러 작품을 연주했지만 특히 그의 라벨, 리스트, 슈만, 그리고 스카를라티의 아름다움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지요. 해석도 뛰어나지만 소리의 섬세함과 음색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완벽 그 자체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아마도 칸텔리, 미켈란젤리, 아바도, 아카르도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이탈리아계 연주자들은 공통적으로 완벽한 기교와 투명한 음색을 선호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엄격하게 말하면 어떤 하나의 악파에 속한다고 말할 수 없어요. 다만 미켈란젤리와 함께 공부를 한 나로서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예술성을 지닌 그에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교수법은 엄밀하거나 세세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모든 피아니스트는 각각 다른 육체적 조건을 갖고 있다. 특히 남성과 여성은 더욱 다르다. 그러므로 근육의 훈련은 제각기 맞는 방법으로 해야지 강요할 수 없다. 보편적이고 특별한 테크닉 연마법이란 없다.” 고 말했다. 테크닉 뿐만 아니라 해석에서도 그랬다. “나는 내 무늬로 학생들이 태피스트리를 짜게 하고 싶지 않다. 복사판(카본 카피)을 만든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는다. 때론 그의 가르침은 추상적인 설교를 연상시켰다. “음색에 대해 생각할때는 피아노가 아닌 다른 악기를 상상하는 것이 좋다. 내 경우에는 바이올린과 오르간 소리가 섞인 소리 같다고 할 수 있다. 페달은 호흡을 지탱해주는 나의 폐와 같다” 라는 등.

그러나 대부분의 제자들은 그가 열정적이고 주의깊으며 잘 준비된 교사라고 회상했다. 그는 연주회를 통해서 벌어들인 막대한 수입을 제자들을 위하여 사용하였고 60여명의 제자들에게는 경제적 후원까지 뒷받침하였다. 그의 레슨과 강좌는 언제나 무료였다. 음악은 그것을 누릴 가치가있는 사람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한 것이 그의 원칙이였기 때문이었다. 미켈란젤리는 1943년 9월 20일 어린 시절 브레시아 음악원에서 만난 그의 제자 줄리아나 귀데띠와 결혼을 하였다. 그녀 역시 조용한 삶을 살았으며 남편과 같이 공개 석상에는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결혼 것조차 모르는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그를 독신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의 아내는 그의 조언자이자 연주회와 일시를 계획하는 매니저였고 그외 경제적인 일들까지 맡아보았다. 그녀는 남편의 좋은 상담자이자 비서였다. 최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그의 콘서트가 많은 돈벌이가 된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회상하였다.

모습이나 행동 그리고 분위기에서 미켈란젤리는 야행성으로 분류된다. 사실 그는 밤 늦게까지 명상을 하거나 연주를 하곤하였다. 그러다 새벽 무렵에 잠자리에 들었고 오후 2시경이 되어서야 연주와 레슨을 시작하였다. 미켈란젤리는 늘 좋지 못한 건강 때문에 시달렸고, 오랜 세월 오른쪽 팔의 통증으로 고생하였다. 애연가였던 그의 습관 때문에 폐도 많이 좋지않았다. 그는 그가 입는 옷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여름과 겨울에 입을 2벌의 옷만 소유하였다고 한다.

다른 피아니스트들에게 미켈란젤리는 훌룡한 경청자였고 그의 취향에 맞지 않는 해석을 가진 연주자들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코르토부터 판데레스키까지 훌룡한 동시대 연주들의 연주를 접할 기회를 많이 가지고 있었기때문에 다양한 20세기 피아니즘과 변천과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런 미켈란젤리가 평소 특별히 높게 평가한 음악가는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와 귀도 칸텔리였다.

미켈란젤리는 결코 인터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 역시 그보다 더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사생활의 보호를 위하여 심지어는 그들이 결혼한 사실까지 무시하고는 하였다. 인터뷰를 거듭 피하다가 결국 수락해야 할 경우 미켈란젤리는 툭하면 거짓말을 하거나 꼭 말해야 할 사실을 빼놓곤 했다. 그는 그의 선생님들이 독일인이거나 오스크리아인이였고, 그의 할머니는 그를 데리고 유럽을 여행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는 또 부친이 ‘베네딕트파’에 속하는 오스트리아 학자 집안이고 모친은 슬라브계라고 얘기하곤 하였지만 근거없는 얘기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할머니는 그를 데리고 자주 여행을 다녔으며 그의 기질은 분명 이탈리아 사람의 보편적인 기질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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