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정신부님과 관련해서 성탄 전에 쓴 글인데 다시 올립니다. 신부님이 건강을 회복하셔서 예전처럼 활기있게 생활하시길 빌면서…
이 세상의 모든 약한 사람, 소외된 사람, 모자란 사람, 억울한 사람,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가고 고문당하고 죽임당한 사람, 그런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하고 같이 울어주는 사람, 그리고 ‘각자의 존엄을 잃지 않으면서 모두가 모두를 끌어안는 새 세상’을 향하여 자그마한 발걸음이라도 함께 하려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예수는 살아있고, 더 나아가 그 모든 사람들이 우리 시대의 작은 예수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인물 탐구는 특별히 성탄 특집으로 마련하려 합니다. 사실 이 분을 거론하는 것이 무척 조심스러웠습니다. 뭐 전에 분들도 다 마찬가지였지만 이 분 역시 자꾸 알려지는 걸 무척 꺼려하시는데다가 (그래도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졌음) 제 글발로는 이 분의 깊이를 제대로 다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지요)
저에게는 큰 스승이며 마음을 드러내어 나눌 수 있는 벗이자, 어렵고 힘들 때는 아무 때고 가서 안길 수 있는 아버지와 같은 분입니다.

□ 이름 : 정일우. (공개여부에 대해 본인 동의 못 받았지만 사실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기 때문에 감히 공개함. 옛날 미국이름은 죤 V. 데일리였으나 1960년에 한국에 건너와 정일우라는 이름을 얻은 뒤 줄곧 이 이름을 씀)
□ 별명 : 땡초 신부, 땡 신부, 우리 애들은 할배 신부라 부름.
□ 본관 : 삼송 정씨로 시조이자 마지막 혈통임. (99년에 귀화하면서 당시 살던 동네인 삼송리를 본관으로 삼아 시조가 되었으나 불행히도 독신이라 대를 이을 손이 없음)
□ 나이 : 1935년생(돼지띠라서 아무거나 잘 먹는 잡식성(?)이라고 본인은 주장) 올 해 한국 나이로 70세인데 평소 ‘몸은 나이가 있으나 마음은 나이가 없다’는 지론을 펴면서 젊은 사람들과 막 어울리고 맞담배를 강요(?)함
□ 고향 : 미 합중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옆의 촌동네(동네이름을 한 번 들었는데 까먹었음)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남. 현재 형님과 조카들은 계속 농사짓고 있음
□ 직업 : 공식적으로는 천주교 예수회(수도회의 하나로 빠콩이도 여기 소속) 사제인 것 같음. (평소 하는 언행이나 옷차림으로 보아서는 신부가 아닌 것 같은데, 가끔 신부 옷 입고 미사 드리고 하는 걸 보면 맞는 것 같음. 어쨌든 예수회에 적을 두고 있는 건 확실함) 교수, 도시빈민, 농사꾼도 역임함
□ 평소 좌우명 :
① 그냥 살아버려~ (이리저리 짱구 굴리지 말고 마음가는대로 몸 가는대로 아니면 닥치는 대로)
② 인생은 지랄이다. (삶이나 일이 대개 쉽게 희망대로 안되고 꼬이는 쪽으로 흐름)
□ 취미 : 술 취한 상태에서 음악 듣기.(죤 덴버, 정태춘 좋아함)
□ 특기 : 담배 피기 (하루 2갑), 남 얘기 들어주기.
□ 약력 : 아일랜드 이민 후손으로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남. 예수회 신학교에서 서품을 받고 1960년 선교사로 한국에 건너옴 서강대학교 교수(신학)로 재직하던 70년대 초반 청계천 판자촌을 방문하여 잠시 머물다가 도시빈민들의 삶과 인간성에 끌려 빈민운동을 시작. 일생의 벗 제정구 만남.
77년 제정구, 양평동 뚝방 동네 철거민들과 함께 시흥에 ‘복음자리’ 마을을 건설했으며, 「천주교도시빈민회」를 결성해 80년대 내내 강제 철거에 맞서 도시빈민운동에 헌신함 .
94년 예수회 부지구장으로 있던 중 당시 빠콩 신부의 주사파 발언에 참담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부지구장을 내놓은 뒤, 호박구덩이가 사는 이곳 청천면 삼송리로 이주하여 2002년 봄까지 〈솔뫼 농장〉 식구들, 마을사람들과 어울려 농사지으며 생활함.
2002년 봄부터 다시 서울로 불려 올라가 현재 예수회 내 좌파(?) 신부들이 모인 공동체의 원장으로 있음.
□ 호박구덩이와의 인연 : 93년 농민회의 소개로 우리집에 농활을 와 있던 한 예수회 수도사(수사)를 만나러 왔다가 인연이 됨. (이후 1달에 1번 정도 이 곳을 찾으시다가 94년 빠콩 사건 이후로 아주 내려옴)
이후 거의 매일 붙어 다니며 일하고 술먹고 이야기하고 울고 웃고 싸우며 살았음. (땡신부와 호박이 먹어치운 술병만 팔아도 중고 트럭 1대는 살 것임)
□ 대선 때 지지 후보 : 87 – 97까지는 김대중이었으나 투표권이 없었음. 2002년 대선 때는 귀화한 뒤라 투표권을 가지고 노무현 후보에게 당당하게 1표 던짐. (대선 전 노사모 가입, 탄핵 당시 매일 촛불집회 나감)
□ 인간적 특징 : 신부인데 신부 같지 않음. 미국사람인데 (현재는 아니지만) 미국사람 같지 않음. 지식인인데 지식인 같지 않음. 어른인데 어른 행세 안함. 모든 경계에서 자유로움 그러면서도 있는 그대로를 드러냄. 욕도 잘하고 농담도 잘함. 한국 사람보다 한국 사람을 더 잘 이해한다는 중평.
□ 몇 가지 일화
십수 년 전 명동성당의 민중집회에 땡신부가 참여했는데 구호가 “***를 **하는 미국놈들 몰아내자!!”였다나. 그런데 땡신부, 구호를 끝까지 따라하고는 혼자 용감하게 “나만 빼고, 나만 빼고!!” 주위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는 집회장이 웃음바다가 됐다는…….
땡신부가 ‘3.12 탄핵’ 직후 매일 촛불집회에 다니다 KBS 라디오 「송지헌의 집중취재」에 발탁되어 10여 분 간 인터뷰를 한 적이 있음. 탄핵 사태를 어떻게 보냐는 송지헌의 질문에 “한민자가 자기네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지랄하는 거죠”라고 답변함.
비방송용어가 공중파를 타고 나가자 당황한 송 아나운서가 “이 분이 귀화하신 분이라 우리나라 말이 서툴러서”라고 슬며시 넘어갔으나 나중에 땡신부에게 알아본 결과 말이 서툴러서 그런 것이 아니고 일부로 막말을 골라 쓴 것으로 확인됨.
예전에 땡신부를 잘 아는 한 시인이 땡신부를 가리켜 “양놈 아닌 양님” 이라 했다고.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땡 신부님의 진면목을 제대로 드러내는 것이 참 어렵네요. 특히 이 곳 농촌에서 〈솔뫼농장〉 식구들과 농사지으며 있었던 파란만장한 사연들을 다 이야기 하려면 이 밤을 다 새워도 모자랄 듯.
예수가 다시 세상에 오십니다. 아니, 예수는 이미 와 있었고 지금도 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오겠지요. 자신을 둘러싼 높은 벽과 경계를 허물고 스스로를 낮추어 세상과 하나가 되고 세상과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신을 풀어헤쳐 해방과 평화의 기운을 드러내 꽃피우는 여기저기 숨어있을 땡신부 같은 이들.
이들이 바로 우리 시대의 작은 예수들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M_신부님 최근 근황…|less..|

34년 간 노동ㆍ빈민운동 투신하다 2005년 중풍으로 쓰러져
“귀화한 한국은 나의 나라…이 땅에서 죽고 묻힐 것”
(서울=연합뉴스) 이한승 기자 = 빈민운동의 대부이자 `파란눈의 신부’로 유명한 정일우(본명 John V. Dalyㆍ73) 신부가 3년 전 중풍으로 쓰러져 투병 중인 사실이 알려져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정 신부는 현재 부축 없이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거동이 불편하고 숨이 차서 10분 이상 말하기도 힘든 상태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정 신부는 1960년 9월 예수회 신학생 신분으로 처음 한국땅을 밟았다.
1963년 실습이 끝난 뒤 일단 미국으로 돌아갔다 4년 뒤 고등학교 은사인 고(故) 바실 M. 프라이스 신부(Basil M. Price. 2004년 선종)의 영향으로 다시 한국을 찾았다.
서강대 설립 주역인 프라이스 신부는 1966년 국내 최초로 노동문제 연구소를 열어 34년 동안 노동자들에게 노동법과 노조 활동, 단체교섭 방법 등을 가르친 국내 노동 운동의 선구자다.
프라이스 신부와 함께 서강대에서 강의를 하던 정 신부는 1972년 학생들이 유신반대 운동을 하다 당시 중앙정보부에 잡혀 들어간 것을 계기로 사회운동에 눈을 떴다.
당시 정 신부는 학생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며 8일 동안 단식했다.
이후 개발 논리에 밀려 비참하게 살고 있는 빈민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뒤 학교까지 그만두고 청계천과 양평동 판자촌 빈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빈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빈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의식 교육을 하고 판자촌 철거 반대 시위를 주도하며 빈민의 `정신적 아버지’로 자리매김했다.
서울올림픽을 앞둔 1980년대. 시내 곳곳에서 철거작업이 진행되자 상계동과 목동 등지에서 철거민을 도왔고 이들의 자립을 위해 `복음자리 딸기잼’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정 신부 곁에는 항상 고(故) 제정구 전 의원이라는 든든한 동지가 있었고 이들은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86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공동 수상했다.
당시 이들의 활동상과 철거민의 아픔을 그린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상계동 올림픽(1988)’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 신부는 4일 당시 활동과 관련해 “판자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개발 논리에 밀려 정부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라며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그들을 외면할 수 있나”라고 되물었다.
그는 1998년 귀화한 뒤 충북 괴산에 농촌 청년의 자립을 돕기 위한 누룩공동체를 만들어 농촌 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그러나 정 신부는 2004년 말 단식 도중 처음으로 쓰러졌다가 2005년 7월 중풍으로 다시 쓰러진 뒤 모든 활동을 접고 화곡동 그리스도신학대 내 말로이시오 공동체에서 요양 중이다.
정 신부는 “처음에는 빈민을 돕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지만 활동을 하다보니 그들과 함께 지내는 게 너무 좋았다”며 “내게 소중한 것을 가르쳐 주고 죽은 뒤에 묻힐 한국은 나의 조국이다”라고 말했다.
jesus7864@yna.co.kr
(끝)
제가 아는 신부님과 비슷하신 분이 또 있군요. 박문수 신부님이라고 은사신데, 제가 학교 다니던 20여년전에 귀화하셨고 그때부터 도시빈민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저희들을 당시 재개발이 한창이던 도화동 등으로 나가서 함께 느끼고 공감해 보라 하셨으니까요. 이후에도 지금까지 늘 도시빈민운동으로 하시고 지금은 독립문에서 평화의집(http://www.paxgate.co.kr/ver_01/)을 이끌고 계십니다.
매달 작은 금액이나마 도움을 드리는데, 이런 글들을 읽다보면 금액이 턱없이 적은게 너무 부끄럽기만 해지네요…
아이고, 신부님~~~ 부디 강녕하옵소서어어어!!!!!!!!!!!!
평소에 만술님 블로그를 열독하는 구독자로써 이렇게 방문해주시니 반갑습니다. ^^
말씀하신 신부님에 대한 만술님의 블로그 글도 잘 봤습니다. 타국에 와서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모습을 뵈니 한국 사람인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그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