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신자서전II] 아들을 인질로 자백을 강요받다

팔레스타인 무장항쟁그룹 ‘하마스’ 지도자 야신의 수기 II- 야수적인 이스라엘 감옥생활

1987년 하마스(회교저항운동)의 창설과 함께 역사적인 인티파다(봉기)가 시작되면서 새로운
무장투쟁의 가능성을 확인한 나는 좀더 구체적으로 지하드(성전)의 전략을 수립해나가면서 한편으로는 항쟁의 하부조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나는 하마스의 조직강화를 위해 1987년 12월 중무장 이스라엘군을 향해 팔레스타인 시민들이 보여주었던 그 저항의
의지가 주로 회교연합이라 불렀던 자선단체들, 예를 들면 회교공동체 같은 조직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동시에 나는
종교서적 출판과 더불어 금요기도 같은 데서 설교하고 강연하는 일에 신경을 쓰면서 대중조직화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무장투쟁 준비가 탄로나다


△ 하마스 대원들의 다양한 복면들. 이들에게 죄가 있다면 팔레스타인의 독립과 이스라엘의 철수를 요구한 것뿐이다.

되돌아보면, 하마스의 실질적인 성전은 이미 1982년 나와 동지들이 무기를 구해 사용법을
익히면서 이스라엘 침략자들에 맞설 준비를 해왔던 시절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우리의 무장투쟁 준비는
이스라엘이 심어놓았던 첩자들에 의해 행동 직전에 탄로나고 말았다. 그 결과 나를 포함한 쉐이크압드 알라흐만 팀라즈, 아랍
무흐라, 닥터 모하마드 쉬합, 닥터 모하마드 사마라, 닥터 이브라힘 알 마쿠아드마와 같은 핵심인자들과 사비르 아부 우다 같은
대표적인 전사들이 체포되면서 본격적인 무장투쟁의 시기가 애초 계획보다 지연되었을 뿐이다. 모든 무기를 몰수했던 이스라엘군은
동지들에게 3년에서 12년형을 그리고 주동자로 꼽은 내겐 13년형을 때렸다.


그 일은 1984년 6월 어느 날 벌어졌다. 들이닥친 이스라엘 정보부 요원들에게 군관 내의
경찰서로 끌려 갔던 나는 이스라엘군의 심문소에서 1차 조사를 받은 뒤, 다시 아스카란형무소로 옮겨졌다. 여기서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무기를 구입했는가에서부터 누가 조직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끝없이 물고늘어졌다. 나는 모든 걸 사실대로
자백했다.


“모든 무기는 내가 구입했고 이 무기들은 대이스라엘 항쟁을 위해 쓸 계획이었다.” 숨길
이유가 없었다고 믿었던 탓이다. 이렇게 해서 40일간 계속되었던 지독한 심문은 끝이 나고 나는 4명의 동지들과 함께 가로
2.5m 세로 1.5m짜리 방에 수감되었다. 환기구도 창문도 없는 이 감방은 특히 여름철엔 지옥이었다. 건강이 악화된 나는 다시
라말라의 군병원감방으로, 또 가자의 중앙형무소로 계속 옮겨졌다. 나를 한자리에 두면 다른 수감자들에게 항쟁의식을 ‘전염’시킨다고
믿었던 모양인지.


가자중앙형무소에서 끝날 것으로 믿었던 이감은 다시 사막 한가운데 자리잡은 알 사바아형무소로
이어졌고, 얼마 뒤에는 다시 가자중앙형무소로, 또다른 사막의 나프하형무소로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내 건강은 최악의 상태로
빠져들었고 이스라엘 당국은 나를 아스카란형무소로 이감시켰다. 그리고 1985년 항쟁 탓인지 나는 다시 사막의 사바아형무소병원으로
옮겨졌다. 여기서 나는 1985년 5월20일,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 ‘포로교환협상’으로 풀려날 때까지 지냈다.


석방된 뒤 무장조직 하마스를 창설해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 침략자들에게 맞서 싸우던
1989년 5월18일, 이스라엘군은 내가 살고 있던 가자지구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수많은 병력을 투입해 나를 다시
가자중앙형무소로 압송해갔다. 이번에는 채 16살도 안 된 내 아들 압드 알하미드까지 함께 끌고 갔다. 형무소에 도착하자마자
산덩이같이 거대한 몸집을 지닌 이스라엘군 심문관은 구타부터 했다. 내가 혼수상태에 빠진 다음 그들은 무장조직의 실체와 당시
이스라엘군을 공격했던 단원들의 신원을 불라고 요구했다. 이제 한국의 독자들에게야 고문없이도 자발적으로 불 수 있는 이름이지만,
당시 이스라엘군을 공격했던 그 무장조직은 하마스의 핵심인 ‘알무자히둔 알피리스티니욘’과 ‘팔레스타인 무자히둔’ 두개의 부대였다.


그러나 이건 1984년 내가 무장조직을 준비할 당시와는 전혀 다른 상황으로, 나는 어떤
경우에도 하마스의 무장조직에 대한 정보를 적들에게 불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자 이스라엘군 수사관들은 내 아들을 데려와서
내가 보는 앞에서 거의 죽음에 이를 때까지 갖은 폭행과 고문을 해댔다.


“이건 나와 내 아들만의 고통이 아니다”


수사관들의 발에 짓이겨진 아이는 숨이 넘어가며 눈꺼풀이 뒤집혔다. 이런 상황 아래서
수사관들은 내게 자백을 강요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 특히 수많은 곡절의 역사를 체험했던 한국의 아버지들이라면 이런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드는데?


여하튼 이 지독하고 야만적인 심리전, 그 속에서는 나는 내 아들이 죽어가는 꼴을 바라보며
팔레스타인의 모든 젊은이들을 생각했다. “이건 내 아들과 나만의 고통이 아니다. 침략자 이스라엘에 당하고 있는 모든 팔레스타인
시민들의 수난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끝내 입을 다물 수 있었다. 10일간의 격렬한 고문이 밤낮으로 이어졌고 나는
완전히 탈진한 채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이스라엘 수사관들은 나를 ‘짐승’이라 부르며 라말라병원으로 이송했다. 그곳에서는
급성폐렴 진단을 내렸으나 수사관들은 나의 건강상태를 조금도 생각지 않은 채 병원에서도 심문을 계속했다. 이미 그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내가 하마스의 무장조직을 주도하고 있다는 증거를 확보했고 다만 나의 자백만 남은 상태였다.


4개월이나 계속된 심문으로 초죽음이 된 나는 크팔 요나형무소로 옮겨졌다. 이때 이스라엘군은
지체가 부자유스러운 나의 수형생활을 도울 이들로 본디 하마스 수감자 가운데 2명을 보조원으로 붙여주기로 했던 계획과 달리 2명의
팔레스타인 대중해방전선(PFPL) 단원들을 붙였다. 이스라엘 당국은 팔레스타인 내부의 분열을 노려 하마스와 다른 노선을 걷고
있던 단체의 조직원들을 나의 수행원들로 임명했던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부터 나의 감옥생활은 다시 시작되었다. 특별수인 내겐 햇빛도 들지 않고
환기마저 되지 않는 특별한 방이 주어졌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시민들은 법적보호도 받을 수 없는 그 형식적인 재판이 시작되었다.
나는 당시 3명의 판사 가운데 내게 터무니없는 편견과 부정을 지닌 한명을 거부했다. 판사를 거부할 수 있다는 법에 따라. 물론
이건 이스라엘 시민 가운데서도 잘생기고 힘깨나 쓰고 돈 많은 이들에게만 통용되는 법이겠지만. 기대도 없었지만 당연히 판사거부에
대한 나의 법적요구는 무시되었고, 나는 그 판사들로부터 ‘종신형+15년’이라는 특별한 형을 선고받았다. “야신은 이스라엘을
제거하고 회교국가를 창설하기 위해 무장조직을 만든 범죄자로서…”라는 판결문과 함께.


크팔 요나형무소의 좁은 방과 저질스런 음식 그리고 열악한 의료환경은 이미 신체적으로
치명적인 상해를 입은 내가 견뎌내기엔 무리라는 판단을 했으나, 팔레스타인 시민인 내겐 어떤 대안도 없었다. 다만
국제적십자위원회에 감옥상황을 고발하는 수준밖에는.


발가벗겨져 몸수색 당하는 면회자들


혼자서 일어설 수도 앉을 수도 없을 만큼 신체적으로 부자유스러운 내가 그래도 팔레스타인의
독립투쟁을 주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조건은 그나마 듣고 볼 수 있다는 감각기관의 건강함이었는데, 이 감옥에서 결국 나는 청력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지금도 도우미 없이는 누구와도 대화를 나눌 수 없는 형편인데, 이게 바로 크팔 요나형무소의 ‘훈장’인 셈이다.
지금도 시달리는 이염이나 만성적인 호흡곤란증 같은 것들은 모두 그 형무소에서 얻었는데, 당시 내겐 치료라는 기본적인 인권조차
인정되지 않았던 탓이다.


여기서 반드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권의
차원에서 나는 이스라엘 감옥의 야만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를 세계 시민들에게 고발하고자 한다.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에 대한 이스라엘
당국의 반인권적인 탄압과 수감 환경은 접어놓고, 나는 수감자 가족들의 인권이라도 말하고 싶다.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의 가족들이
면회를 하기 위해서 하루종일 이곳저곳을 다니며 허가서를 얻는 과정조차 인권유린인데, 이보다 더 한 일은 면회소에서 벌어진다.
수감자도 아닌 그 가족들이 수감자보다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형무소당국은 야만적으로 면회 가족들을 발가벗겨 몸수색을 하고 있다. 면회도 이스라엘 감시관이 보고 듣는 바로 옆에서만 가능하다.
물론 옷과 음식 같은 것들을 전해주는 일들은 일체 금지되어 있고.


어쨌든 이런 현실 속에서 그뒤로도 나는 탈몬드감옥과 라말라감옥병원을 전전하다, 1997년
10월1일 석방되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의 요원이 요르단에서 카리드 마샤알을 살해한 국제적인 범죄행위가 발생한 뒤, 그
요원과 나를 맞교환하는 국제적인 협상에 따라 결국 나는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내게로부터는 비록 흘러갔지만, 세계인들이 알고 있듯이 아직도 수많은 팔레스타인의 젊은이들이 이스라엘의 야수적인 감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이 젊은이들이 야만적인 이스라엘 감옥에 갇힌 까닭은 자신들의 조국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외친
죄밖에는 없고, 이 젊은이들이 반인륜적인 이스라엘 감옥에 사로잡혀 있는 까닭은 오직 침략자 이스라엘의 철수를 요구한 죄밖에는
없다. <다음에 계속>


아메드 야신(Ahmed Yassin)/ 하마스 최고지도자

출처 : 한겨레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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