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알조우라에서 태어난 야신은 사지가 마비된 몸으로 휠체어에 않은 채, 대이스라엘 무장항쟁을 주도해 온 팔레스타인의 전설적인 항쟁지도자다. 특히 서방세계로부터 최고 테러리스트 그룹으로 낙인 찍힌 ‘하마스’를 창설한 그를 국제사회가 과격무장테러단체의 우두머리라는 악명을 달아 놓은 것과 달리, 팔레스타인 현지 시민들 사이에서는 가장 신임 높은 종교지도자이자 해방투쟁가로 대조적인 명성을 날리는 인물이다. |
나는 1936년 지중해 연안의 알조우라마을에서 태어났다. 팔레스타인의 역사가 깃든 알스카란지역의 한 조그만 이 마을이 내게 남긴 기억이라고는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의 고통같은 것뿐이다. 이제 그마저 희미해져 버렸지만, 이복형제 둘을 포함해 모두 일곱아이들이 하루종일 어머니의 채소밭 일을 돕던 풍경이라든지 늘 먹을거리가 모자라 끼니때마다 아우성치던 일들이 떠오른다.
그 무더웠던 피난촌의 여름
![]() △ 48년 대학살에 이어 67년 이스라엘 군은 이집트의 시나이반도까지 침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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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살되던 해, 아버지가 2차대전의 난리통에 세상을 떠나버리자, 단 한뼘의 땅도 없었던 우리는 아이들까지 모두 소작에 매달려 가까스로 끼니를 때웠다. 온 세상을 휩쓸던 그 전쟁 통에 누군들 배불리 먹었겠는가만은, 특히 1차세계대전이 끝난 1917년부터 영국의 통치를 받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런 혹독한 가난 속에서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될 무렵, 이제 굶주림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영국과 유럽으로부터 온갖 신식무기를 지원받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이름 아래 비무장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했다. 영국 통치당국은 이스라엘에게 전투기와 탱크에다 각종 대포를 지원하면서 대량학살극의 길잡이 노릇을 했다.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단 한자루의 총만 지녀도 사형당하던 시절이었다. 이스라엘의 이 잔혹한 학살은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조국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고, 1948년 들어 피난민의 숫자는 거의 500만명에 육박했다.
물론 우리도 마을주민 3000여명과 함께 난민 신세가 되었다. 피할 데라고는 바다뿐인 우리 마을 주민들은 결국 15km쯤 떨어진 가자지구 바닷가의 숲 속으로 피난했다. 그리고 겨울로 접어들면서 우리는 나무를 먹었다. 한국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어쨌든 이런 최악의 상황은 국제연합구제사무국(UNRWA)이 먹을거리를 날라다 줄 때까지 계속되었다. 우린 덮을 옷도 잠자리도 없었다. 내남없이 모두 나무 둥치에 기댄 채 땅바닥에 쪼그려 잠을 잤다. 그러다 국제연합구제사무국이 한 가정에 하나씩 지급한 5인용 텐트로 그나마 누워서 잠을 자게 되었다. 텐트는 비록 협소하기 짝이 없었지만, 식당으로 부엌으로 침실로 공부방으로 심지어 화장실로 하루에도 수십차례씩 기능을 바꿔가며 전천후 살림집 노릇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쯤되니 공부도 학교도 끝장났다. 다른 아이들보다 1년 먼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수재’로 불리던 내 꿈도 함께.
눈감았던 국제사회를 결코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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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스라엘군들이 ‘통곡의 벽’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1952년 6월, 그 무더웠던 피난촌의 여름은 내 삶에 운명의 시간으로 다가왔다. 나는 바닷가에서 또래 아이들과 달리기 시합을 했다. 넘어졌고, 그리고 한참만에 정신을 차렸을 때, 사지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40일 동안 병원 신세를 진 뒤, 의사들이 포기해버린 내 몸뚱아리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꼼짝도 않는 몸을 움직여 보려고 혼자서 갖은 애를 썼다. 그러나 손가락 끝만 미세하게 떨릴 뿐이었다. 두어차례 이집트의 병원으로 옮겨져 받았던 치료도 헛일이었다. 목 부분의 척추뼈가 부러진 나는 결국 그날부터 마비된 사지를 휠체어에 얹어 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마비된 사지, 내 몸뚱아리를 끝없이 쳐다보던 어느날, 내 정신만큼은 팔팔하게 살아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공부를 계속하기로 작정했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가며 1958년 상급학교(오늘날 학제로 보면 고등학교에 해당)를 마쳤다. 그리고 교사시험에 응시했다. 각지의 상급학교, 사범학교, 농림학교에서 몰려온 수많은 응시자들로 그 시험은 1500대 1이라는 엄청난 경쟁률을 보였다. 무사히 이 관문을 통과한 나는 1958년 10월부터 알-카멜초등학교의 교사가 되어 1984년 건강 탓으로 더이상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을 때까지 근무했다.
다시 옛날로 되돌아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나는 계속 종교를 공부했고, 가자지구에 있는 알-압바스사원의 설교자가 되었다. 사실 종교에 대한 관심은 이미 상급학교 시절 ‘회교회운동’에 가입하면서부터 시작된 셈이었다. 그뒤 나는 시민들에게 알라(신)를 일깨우는 이 단체의 운동가로 활동하다가 1965년 체포당했다. 당시 압드 안나설 대통령은 이 회교회운동을 극심하게 탄압했고, 체포된 두명의 회원들은 사형까지 당했다. 이무렵 나는 초등학교의 교사이면서 동시에 카이로대학 영문과에 다니는 학생으로 이중생활을 했다. 가자지구는 1967년 이스라엘이 강점할 때까지 이집트정부가 관할하고 있었는데, 나는 체포 한달만에 풀려났지만 이집트당국이 나의 카이로 여행을 금지시켜버려 대학을 1년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점령해 있던 가자지구에서 선교와 설교와 출판을 통해 보다 조직적으로 알라를 외쳤다. 그 시절 내가 외친 ‘알라’의 의미는 종교만을 위한 종교가 아니었다. 침략자 이스라엘에게 저항하는 수단이었고 한편으로는 팔레스타인 내부사회에 대한 각성을 요구하는 운동이었다. 예를 들면, 당시 출판했던 내 책 가운데는 ‘저울 속의 술’이란 게 있었는데, 이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회를 파괴시킬 목적으로 조직적인 부패를 조장하는 가운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술과 마약에 찌들어 가는 현실을 타격한 내용이었다.
교사로서 종교운동가로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던 나에게 다시 한번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1967년, 내가 죽어서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침략. 이 날을 나는 1948년의 대학살과 함께 가슴 속 깊이 묻어두고 있다. 이스라엘은 1967년 팔레스타인 영토 뿐만 아니라 주변 이집트의 시나이반도와 시리아의 골란고원까지 침략했고, 팔레스타인 형제·자매들을 모두 외국으로 쫓아냈다. 1948년의 대량학살에서 겨우 살아남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결국 또 난민이 되어 요르단과 레바논을 비롯한 아랍국들로 뿔뿔이 흩어져 나갔다.
‘성전’의 논리를 발견하다
이스라엘은 대신 세계 각지에서 불러들인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의 땅을 집어주며 ‘정착촌’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환희에 찬 유대 이주민’ ‘쫓겨나는 팔레스타인 난민’. 당시의 그 극명했던 불법과 부도덕을 바라보면서도 ‘지긋이’ 눈을 감았던 국제사회를 나는 절대로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이스라엘의 침략은 팔레스타인의 피가 흐르는 내게 ‘해방운동’을 명령했다. 침략자 이스라엘은 해방운동을 악랄하게 탄압했고 심지어 어린이와 여성들이 피난한 난민촌마저도 집중 공격의 목표물로 삼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팔레스타인 내부는 또 내부대로 썩어갔다. 이스라엘이 지원하는 술과 마약과 섹스에 중독되는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이 늘어만 갔다. 이 젊은이들은 술과 마약과 섹스를 얻기 위해 이스라엘의 끄나풀이 되거나 정보원 노릇을 했다. 자신들의 조국이, 자신들의 형제가 숨을 거두어 가고 있는 판에.
여기서 나는 회교에 충실한 회교도의 정신 속에서 ‘성전’의 논리를 발견했다. 회교에서 가르치는 자기희생, 이건 바로 조국해방과 침략자 축출을 위한 투쟁 속의 ‘순교’였다. 신은 우리들의 희생을 허락할 것이며 결국 희생자들은 천국으로 갈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나는 측근들과 함께 연구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무장항쟁과 대중투쟁을 하나로 묶어 적 이스라엘에 대한 실질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가.” 그 결과, 1987년 하마스(회교저항운동)의 창설과 함께 역사적인 인티파다(봉기)의 불꽃이 튀어 올랐다. 1987년 12월14일, 이스라엘 트럭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을 깔아죽인 사건이 발생하면서부터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의 대형집회를 주도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하마스의 무장항쟁은 시작되었다. <다음에 계속>
출처 : 한겨레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