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이긴 쉽겠지, 그러나…”

야신에 대한 생각을 끊임없이 계속하는 이유는, 그의 삶 자체가 팔레스타인을 대변한다고 생각해서다. 그의 성장과 죽음. 삶 자체가 팔레스타인의 모습을 비추는 것 같다. 좋은 양반인데, 깡패 이스라엘에게 처참하게 암살당했다. 그것도 대낮에… 힘에 의해서 국제질서가 주도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지만, 최소한의 인류애는 갖고 있어야 하지 않나. 이것마저 무시하면서 정의를 운운하는 뻔뻔함은 어디서나오는건가. 그런 뻔뻔한 나라를 추앙하는 미친 작자들은 또 누구고.

‘내 귓가에 맴도는 테러리스트’… 국제분쟁 전문기자 정문태가 만난 야신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 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asianetwork@news.hani.co.kr

“저는 성스러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이 세상 모든 형제들이 정의와 평화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되새기며, 자비로운 지저스 크라이스트의 가르침 앞에 한마음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가 설파하신 정의와 평화는 모든 생명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지난해 12월18일치 <한겨레21> 488호 크리스마스 특집 때 보내왔던 이 메시지는 하마스(이슬람저항운동)의 정신적 지도자 아메드 야신이 남긴 마지막 글이 되고 말았다.

3월22일 이스라엘군이 기도를 마치고 나오던 야신을 헬리콥터에서 로켓포를 쏘아 살해했다. 그리고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는 그 ‘성공적’인 거사를 즉각 인정했다.

마수드와 야신, 두 지도자의 죽음

2000년 11월1일, 제2차 인티파다(Intifada·봉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던 그날도 팔레스타인에는 야신 살해설이 나돌고 있었다.

“나를 죽이기는 쉽지만 팔레스타인을 죽일 수는 없어!” 두 손을 모은 채 한동안 말이 없던 야신은 소년처럼 맑은 눈을 반짝거리며 엷은 미소를 띠었다. 공격용 아파치 헬리콥터를 띄워 대낮 도심에서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을 죽이고, 탱크로 돌팔매질하는 아이들을 진압하고, 함포사격으로 잠든 시민들을 학살해온 이스라엘군이 야신을 살해하는 것은 말 그대로 시간 문제였을 뿐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식으로 부르면 ‘세계 최고 테러리스트 집단의 수괴’인 야신에겐 그 흔한 무장 경호원 한명 없었다. 그가 사는 집도 가자의 한 골목길에 자리잡은 여느 집들과 다름이 없었다. 이스라엘군의 ‘사냥감’이 되어 있든 말든 그는 늘 장례식장과 사원을 오가며 대중 앞에 나타났다. 게다가 그는 열여섯살 때 척추를 다친 뒤 일생을 휠체어에 앉아 살아왔다.

그런 야신을 이스라엘군이 살해하는 일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복잡하게 작전을 세우고 말고 할 일도, 무슨 특수부대를 파견해 암살할 일도 없었다.

나는 지난 몇해 사이에 내게 좋은 친구이자 귀중한 취재원이었던, 또 현대사를 온몸으로 껴안았던 혁명 지도자인 두 사람이 살해당하는 걸 보았다. 한명은 2001년 9월9일 암살당한 아프가니스탄의 전설적인 대소비에트 항쟁 게릴라 지도자 아마드 샤 마수드(Ahmad Shah Masoud)였고, 다른 한명은 야신이었다.

이 둘은 ‘민족해방투쟁 지도자’라는 공통점을 빼면 닮은 구석이라곤 전혀 없다. 둘은 살아온 과정도 투쟁 방법도 그리고 성격과 기질도, 또 살해당한 방식도 모두 정반대였다.

전선에서 게릴라들과 한평생을 보낸 마수드가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녔다면, 종교 지도자로 대중 속에서 살아온 야신은 엄격한 자기통제가 빚어낸 인간미를 지닌 인물이었다. 마수드가 기자로 위장한 정체불명의 암살자들이 터트린 폭탄과 함께 산악에서 사라졌다면, 야신은 총리의 명령을 받은 정규군 헬리콥터가 쏜 로켓포를 맞고 도심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들이 살해당한 뒤에 드러난 세상은 똑같은 모습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마수드”를 외치며 눈물로 마수드의 마지막 가는 길을 따라갔고, 팔레스타인에서는 모든 시민들이 3일간 문을 내린 채 야신을 눈물로 떠나보냈다.

그리고 그 살해는 무겁고도 어두운 공포를 몰고 왔다.

마수드가 암살당하고 이틀 뒤에 ‘우연’인지 ‘기획’인지 또 누가 그이를 살해했는지마저도 드러난 게 아무것도 없지만, 아무튼 세상은 9·11 공격이라는 엄청난 사건에 이어 정복욕에 사로잡힌 미국의 침공으로 뒤집히고 말았다.

그리고 세상은 이제 야신 살해 뒤에 다가올 상상할 수 없는 공포에 빠져들고 있다. 나는 이스라엘이 우발적으로 야신을 살해할 만큼 어리석다고 여기지 않는다. 모든 팔레스타인 시민들이 존경하는 야신을 살해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이스라엘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이스라엘이 야신을 살해할 때는 이미 모든 ‘계산’을 끝냈다는 뜻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지점이 하나 있다. 마수드와 야신 살해가 똑같은 죽임이었지만, 그 성격을 헤집어보면 매우 다른 차별성이 숨어 있다. 마수드 살해가 부담스러운 적을 제거함으로써 상황을 장악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면, 야신 살해는 적의 분노를 촉발해 상황을 혼란에 빠트리는 데 목적이 있다는 점이다.

미국이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하마스 최고 지도자라고는 하지만, 군사에 관여하지 않았던 야신을 살해한들 하마스가 분해되거나 자멸할 것으로 보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야신 살해에 분노한 팔레스타인의 폭력 ‘증폭’을 노렸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 어둠은 어디로 뻗어 있으며, 그 끝은 어디일까?

분명한 건 마수드 살해와 함께 벌어졌던 일들보다 더 무거운 어둠이 몰려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 많은 시민들은 인류가 단 한번도 체험해보지 못한 끔찍한 미래를 상상하고 있다. 세계 시민들은 야신이 살해당하자마자 대통령 선거전에서 위기감을 느낀 부시와 그 동맹국 이스라엘의 ‘합작품’으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과연 야신 살해로 이스라엘이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중동과 국제사회 전체를 뒤흔들 야신 살해를 이스라엘 혼자 결정했을까?” 마수드 살해에서 시작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겪어온 세상 사람들은 다시 야신 살해에 이르자 수많은 의문을 쏟아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야신에 이어 하마스의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한 압델 아지즈 란티시(Dr. Abdel Azziz Rantisi)는 이스라엘의 ‘혼란 조성 전략’을 간파한 듯, 대미 공격 선언을 하루 만에 철회했다. 그러나 미국은 유엔 안보리 15개국 가운데 유일하게 대이스라엘 비난성명 채택을 반대하며 상황을 자극하고 있다. 이미 서로 심각한 ‘수읽기 싸움’에 돌입한 셈이다.

이쯤에서 국제사회는 미국과 그 동맹국 이스라엘이 테러리스트로 낙인찍은 야신이 팔레스타인 시민들에게서 폭넓게 존경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야신이 토해내는 한마디 한마디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심장이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이건 이스라엘이 최신식 전폭기와 가공할 전함에다 최정예 육군을 총동원해서 벌이는 전쟁이다. 저항 수단이 전혀 없는 팔레스타인을 이해하지 않고는 상황을 읽어낼 수 없다.”

야신은 예민한 부분에 이르자 징검다리 밟듯이 조심조심 논리를 펴나갔다.

“우린 그걸 자살폭탄 공격이라 말하지 않는다. 자살이라는 말은 삶을 포기한 매우 비겁한 말이며 이슬람에서는 그런 자살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건 순교다. 그런 희생적인 저항은 이 세상 모든 나라의 역사에서 등장했다. 한국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야신은 그 공격이 이스라엘 시민들을 향하고 있다는 질문에 이르자,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높이려고 애썼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군사훈련을 받고 무기를 지닌 사람들을 시민이라 불러야 옳은가? 국제사회는 비무장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학살당할 때는 시민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렇게 온전하지 못한 몸으로 하마스를 지고, 그렇게 듣기도 말하기도 힘든 병약한 몸으로 휠체어에 앉아 팔레스타인을 이고 살아왔던 야신은 떠났다.

그리고 야신이 내게 했던 말은 아직도 내 귓가를 떠돌고 있다. “당신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했던 독립투사들을 테러리스트라 부르는가? 독립과 자유를 위해 싸워온 우리를 테러리스트라 부른다면, 나는 기꺼이 그 말을 받아들이겠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