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돈 30회중 이인복의 군주론


율곡 이이는 조광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냉정하게 평하였다.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를 다스릴 재주를 타고 났지만, 학문이 채 이뤄지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였다” 뜻은 높지만 결국에 주저앉은 조광조의 개혁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하다.


조광조는 자신의 청렴함과 대의만을 생각해 임금을 압박하고 그 길이 아니면 다른 길은 타협하려 들지 않았다. 그 초인적인 의지는 가상하지만, 현실에서 그 곧은 의지는 목숨과 바꿔야 하는 독배이기도 했다. 조광조가 걸어간 그 길이 옳은 길이었음은 논쟁의 여지도 없는 사실이지만,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어디까지 타협해야 되는지 고민할 수 밖에 없다. 개혁의 순수성과 현실과의 타협이라는 저울위에서 균형을 맞추기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지 모른다.


왜 이런 조광조 이야기를 꺼내들었냐 하면, 오래전에 방송된 드라마 신돈에서 이인복(정성모님) 말하는 개혁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이 동영상 후반부에서 이인복은 공민왕에게 눈물과 통절로 읍소하며 아래와 같이 말한다.

“전하.

전하께서 새로운 길을 한걸음 나가시면 개혁이 되옵니다.


새롭게 하자는 것이니 따르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옵니다.


허나 전하께서 두걸음을 나가시면, 모든 것이 급한 것이 되옵니다.


처음 가보는 길이니, 사람들이 불안하여 선뜻 따라나서지 못할 것이옵나이다.


하온데 전하께서 세걸음을 나가시면 그것은 천지개벽이 되는 것이옵니다.


전하..


천천히 가셔야 합니다.


천천히 가셔야 전하의 백성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가실 수가 있사옵니다……..” 


이 얼마나 내 싱금을 휘어잡는 대사인지 모르겠다. 그 어느 책에서도 이렇게 마음에 와 닿는 개혁에 대한 주장을 듣지 못했다. 게다가 훌룡한 배우의 연기로 직접 이 대사를 들으니 내가 고려시대로 돌아간 듯 생생하게 와 닿는다. 몇 번을 보고 또 봐도 새롭다.


개혁이란 이런 것이다. 비록 가지를 쳐 내야할 때도 있지만 그것을 나무가 건강히 자라기 위해서인 것 처럼 구습과 폐단을 잘라내어 우리 모두가 살기 위함이다. 그것이 바로 개혁이다. 개혁은 모두가 다 같이 가는 것. 공존하지 않는다면 좌,우의 구별도 무의미하다. 좌파가 되었든 우파가 되었든 공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악이 된다. 개혁은 공존을 위한 질서인 것이다.


떄로는 급히 가고, 어서 손에 쥐고 싶은 마음에 칼을 빼어 든다. 우리는 그것을 혁명이라 부른다. 개혁은 고통과 혼란이 따르지만, 혁명은 피와 더큰 혼란을 부른다. 역사가 개혁없이 정체될 때 어찌할 수 없는 마지막 몸부림이 혁명인 것이고, 그만큼 절박하기 떄문에 혁명은 피를 먹고 자란다. 역사를 통해 수없는 사람의 피없이 이룩한 혁명이 있었던가.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 하는 것이 혁명이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피를 부를 수 없다. 개혁이 부단히 이루어져야 하고 멈춰서는 안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개혁을 하는지 방향성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다. 그저 정권 잡으면 내 입맛대로 국민을 억압하고 권력을 휘둘루는 것이 개혁인지 아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 일개 인터넷 논객이 국가를 혼란에 빠트렸다고 잡아들이는 이 희대의 코메디를 직접 목격하는 시대. 우리는 이런 시대를 살고 있다.

시대가 천박해 지니 개혁이라는 말 자체도 진부함의 표상이 되어버렸고, 개혁이라는 말은 좌파를 몰아내고 군사독재시대로 돌아가자는 구호로 전락해버렸다. 무엇보다 가슴을 치며 통탄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은 이 시대을 만든 주역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어도 다수가 선택하면 그것이 곧 결정이고 그길이 나아갈 길이 되는 것이 오늘의 세상이다. 불합리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불완전한 체제를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고문과 피를 흘려왔는가. 불완전하지만 어찌되었든 짊어지고 가야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 현실이고 최선이다.

함석헌은 무식하고 제 눈앞의 이익밖에 모르는 씨알을 바라보며 때로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국 그가 돌아가고 그가 섬겨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아는 사람이었기에, 늘 그 씨알을 위해서 살았다. 하지만 나는 함석헌처럼 큰 그릇도 아니고 세상의 불의까지 감당할 그릇이 되지 않기때문에 이 비루한 오늘을 바라보면 속에서부터 치미는 부아에 욕설이 튀어나온다. 도대체 얼마나 잘 먹고 잘 살려고 나라를 이 개판으로 만들어놓았는지, 이 정권에 표를 던진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리고 투표조차 행사하지 않은 이 나라의 무책임한 반절에게 책임을 묻고 싶다.

그렇게 잘 먹고 잘 사는게 중요한가? 내가 잘 살면 이정도 쯤의 불의는 눈감아 줄 수 있는 것인가? 집값은 떨어져야 하지만 내 집값이 떨어지는 꼴은 못 보겟고, 일자리 창출도 중요하지만 비정규직과 내 몫을 나누는 것은 싫다. 이명박이라는 이 거대한 불의는 알고보면 소악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를 짖밟는 진짜 거악의 바로 우리 마음속의 물신주의이다. 돈때문에 사람답기를 포기한 족속에게 지금의 현실은 어찌보면 과분한지도 모른다.

극중에서 이인복은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다 같이 가는 것이 개혁이라고 그랬다. 오늘 우리는 꼴보기 싫으면 입에 재갈물리고 법이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을 개혁이라 부른다. 둘 중 어느 것이 참된 개혁인지는 바보천치라도 분간할 수 있다. 오늘 우리 이 시대가 왜 암울한지 금방이해가 된다. 바보천치도 구분하는 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다스리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덧글 >
공존하지 못한다면 좌,우의 구별은 무의미하고 그 자체로 하나의 악이라고 볼 수 있다.
노무현이 비록 못한 것이 많은 대통령이었지만 수구세력도 마음껏 대통령을 조롱하고 맞설 수 있는 시대였다.
지금은 전교조를 와해하는 것도 모자라 벌레 잡듯이 박멸하려 들고,
마음에 들지 않는 세력은 생각도 하지 못한 죄명을 들먹이며 잡아 들인다.
그때와 지금 어느 쪽이 공존의 질서가 그나마 잘 유지되었는지 생각해보면 결론은 뻔하다.
생각과 길이 다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지하벙커에서 이름도 없는 일개 인터넷 논객을 국가신인도까지 들먹이며 잡아 쳐 넣는 오늘.
같이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고 생각하는 것이 사치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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