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여섯 살의 겨울, 권정생

1.

나는 열 살 안팎의 나이에 두 번의 전쟁을 겪었다. 2차 대전은 일본에서 당했고, 6.25는 한국에서 치르었다.

전쟁 속에서는 모든 인간이 악마가 된다. 어미니가 갓난아기를 밭고랑에 버리고 먹을 것 때문에 남의 걸 훔치는 건 옛다.

나도 피난길에서 사과를 훔치고 보리도 훔쳤다. 훔칠 수 없을 때는 구걸을 했다. 반찬투정 같은 건 꿈 같은 애기다. 입에 넣고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닥치는대로 먹는다. 흙이 묻었건 똥이 묻었건 가리지 않는다.

살아야 한다는 본능 자체가 절대적 도덕이요 종교다.

자식을 밭고랑에 버려놓고 달아났던 어느 어머니가 백리길을 간 다음, 가까스로 정신이 들자 흐느껴 울면서 아기를 찾는 걸 봤다.

지금도 나는 사람에겐 최소한의 먹을 것과 입을 거소가 그리고 안정된 환경에서만이 사람일 수 있다고 믿는다.

1946년 4월, 내가 부모님의 고향나라인 한국에 온 것은 태어나서 8년 7개월만이였다. 밤새도록 화물열차의 구석쪽에 앉았다가 조그만 시골 역에 내렸을 때, 너무도 세상이 삭막해서인지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다. 벌거숭이 산과 키 낮은 초가집, 그 초가집 골목길에 맨발로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얼굴도 입은 옷도 온통 때투성이었다.

한국에 와서 처음 먹은 음식은 쑥으로 끓인 죽이었다.

1년반동안 떠돌이생활을 하면서 생활터전을 찾다가 겨우 지금 살고 있는 마을에 소작농사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소작농사로는 우리는 학교에 갈 수 없어 어미니가 행상을 나섰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세 식구의 밥을 짓고 살림을 했다. 어머니는 닷새만에 돌아오는 장날에 와서 다음날 이면 또 나갔다.

열한 살 때 여덟 살인 동생과 같이 1학년에 입학을 했고, 2학년때 담임선생님이 3학년으로 월반을 하라고 했고 3학년 땐 5학년으로 월반을 권했지만, 어머니가 반대하셨다. 이유는 상급반은 학교를 늦게 파하기 때문에 집안일을 못한다는 것이다.

6.25때 월북을 한 최△△선생님이 자주 나에게 시험지 채점이나 교실환경저리 같은 것을 거들게 하면 어머니는 찾아가서 제발 일찍 보내달라고 사정을 했다.

“애를 중학교 보낼려면 지금이라도 열심히 돈을 모아두어야지요, 앞으로 1년만 더 고생하면 될 것 같으니 그때까지만 그냥 학교에 다니는 걸로 해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선생님과 나와 어머니는 같이 약속을 했다.

그러나 그 1년 뒤에 6.25가 일어났고,  최△△선생님은 행방불명이 되어버린 뒤 여태 소식이 없다. 어머니가 고생 고생 행상으로 모았던 돈 – 소 세 마리를 살 수 있었다던 돈 – 은 화폐가치가 백분의일로 떨어져 염소새끼 한 마리도 살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열심히 일을 하면 일한 만큼 대가를 받는다는 말도 전쟁시엔 통하지 않는 말이다. 죽이고 죽고 빼앗고 빼앗기면서도 하나같이 피해자만 남는다.

자본주의 반동으로 총살당하고 용공 부역자로 잡혀가서 총살당하고, 다만 죽이는 것만으로 능사로 삼았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앞집 아버지는 반동으로 인민군에게 잡혀가 총살당하고 뒷집 아저씨는 용공분자로 국군에게 총살당했다. 한 동네 한 이웃끼리 서로 감시하며 감시받으며 살아야 하는 살벌한 세상이었다.

해방후 몇해동안은 국민학교 아이들도 드러내놓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서투른 논쟁을 일삼았던 것이, 6.25로 인해 공상주의란 말 자체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용공으로 끌려가 죽은 집 가족들은 이런 분위기에서 그들에게 감해지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견뎌야만 했다.

야학을 열어 마을사람들을 꺠우치고 가르치던 성실한 사람으로 알려졌던 황 △△ 선생이 끌려가 총살당한 뒤, 그분의 형님은 사건과 연구되었다고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불안과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해 목을 매 자살을 했다.

국민학교 김△△ 선생님도 죽고, 최△△ 선생님은 월북을 했다. 최선생님의 월북으로 우리는 오랫동안 풀이 죽어 공부에 대한 의욕을 잃었다. 선생님이 만든 교가를 부르는 것도 중단되었다.

○ ○ 을 빛내인 저 버들나무

명성상 푸르러온 아들한 역사

어진자 길러내인 지극한 그 은혜를

못내 갚았노라.

국민학교의  교가로서는 뜻풀이가 어려운 내용이다. 아쉽게도 나는 이 노래의 두째절을 잊어버렸다.

누가 적이며 누가 내편인지 분간이  되지 못한 시대에 선악의 판단도 어려웠다. 학교에 가나 집에 오나 불려지는 노래는 온통 군가뿐이었다.

무찌르자 오랑캐에서부터 공비톨가까지 목청껏 누가 잘 모르나 어느반이 잘하나 경쟁까지 했다.

인민군 점령 밑에서는 위대한 김△△장군의 노래를 배웠던 아이들은 그들이 떠난 다음엔 즉시 김△△을 떄려잡는 노래를 해야만 되었다.

소년깃발과 인민깃발이 나란히 붙어 있던 곳에 미국기와 태극기가 바뀌어 붙었다. 밤중에 미군들이 여인들을 강탈해가고 가축을 잡아가도 우리는 유엔군아저씨께 감사를 드려야 했다.

여자아이들은 줄넘기를 해도 공놀이를 해도 군가를 부르고, 남자아이들은 전쟁흉내를 내며 난폭하고 쌍스러운 욕지거리를 배웠다. 학교운동장이나 시장이나 어디서도 전쟁용어들로 감정이 거칠어졌다.

순진무구하다는 아이들은 알사탕 한개나 껌 한개 때문에 약삭빠른 눈치를 보고 비굴해졌다. 대한민국을 도우러 온 유엔군들은 아이들에게까지 지극히 음탕한 말씨와 몸짓거리로 즐기고 있었다.

전연병이 만연되었다. 결핵으로 고통을 겪는 아이들이 늘어갔다.

국군에게 끌려가 총살당한 황△△ 선생의 딸 춘자가 그 해 겨울에 폐결핵으로 죽어버렸다. 임파선결핵을 앓던 성칠이도 죽고 승원이도 문자도 학교를 그만 두었다. 자고 나면 누가 어떻게 죽었다는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산에 나무를 하러갔다가 갈퀴로 지뢰를 건드려 폭발하여 죽은 나무꾼도 생겼다.

이렇게 죽음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르 공포속으로 몰고 갔다.

참으로 외롭고 고달픈 시절이었다. 누구하고 조용히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룰 상대도 없었다. 죽이고 쳐부수라는 구호만이 살아있는 세상이었다.

2.

이럴 때, 나는 처음으로 사랑을 했다. 같은 반에 있는 동갑나기 여학생 양자였다. 검정 물감을 들인 옥양목 치마저고리를 언제나 단정하게 입고 다니는 애였다.

그 때는 우리 모두 남학생은 머리칼을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밀어버린 까까머리였고 여학생들은 똑같은 단발머리였다. 그것도 이발관에 가서 깎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가위나 칼로 어설프게 깎은 머리여서 들쭉날쭉 우스꽝스러웠다.

그런데 양자의 단발머리를 참으로 가즈런히 다름어져 있었다. 그 다듬어진 뒷머리 밑에 하얀 동정이 또 언제나 깨끗했다.

그러나 양자한테 내가 마음이 끌린 것은 이런 겉모습이 아니라 무언가 보이지 않는 그늘이 엿보인 것이었다.

양자는 자주 조퇴를 했다.

주로 오전 공부가 끝나면 선생님께 말씀드리고는 말없이 집으로 갔는데, 얼마 뒤에는 아침수업 한두 시간만 끝내고 돌아가기까지 했다. 그 까닭을 함참 뒤에 알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있다는 것이었다.

양자한테 특별히 마음을 쓴 이유가 또 있다. 조퇴가 잦아지기 전 여름에 어느 선생님의 입대송별식을 준비하기 위해, 학교 뒷산 골짜기에 있는 복숭아밭에 복숭아를 사러 가서였다.

학생 한 사람에 얼마씩 모은 돈으로 우리는 가지고 간 책보자기에 복숭아를 싸서 남학생들은 어깨에 메고 여학생들은 머리에 이고 왔다. 그것뿐이었다.

송별회때 둘러앉아 우리는 복숭아 꼭 두 개씩 나눠먹고 헤어졌는데, 양자가 돌아오는 길에 나한테 달려와서 둘레를 살피고 난 뒤에 아무도 몰래 빨간 복숭아 한 개를 내미는 것이었다.

양자 얼굴도 내 얼굴도 모르긴 했지만 그 복숭아만큼이나 빨개졌을 것이다.

나는 얼떨결에 그 복숭아를 받기는 했지만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도 그랬지만 그 뒤에도 복숭아 애기는 커녕 양자한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것이다.

양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끔 가다가 둘이 마주쳐도 모른 척하기 일쑤였다. 그토록 부지런히 공부를 하는데도 양자의 성적은 언제나 중간쯤에서 머룰렀다.

언젠가 외우기시험을 보는데 양자는 짧은 시조 한 수를 끝까지 외지 못하고 만 것이다. 마지막 한 줄을 남겨놓고 얼굴을 붉히며 뻣뻣이 서 있는 것이었다. 양자가 선택한 시조는 신사임당의 ‘까마귀 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였다. 가장 쉽게 누구나 다 외우고 있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마지막 한 줄 ‘창파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를 끝내 외우지 못했다.

듣고 있는 나는 가슴이 더욱 타는 듯했다. 양자는 그만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공부가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양자가 겨울방학이 다가올 즈음 조퇴가 늘어나더니 말없이 사흘 동안 결석을 했다.

나는 쪽지 한 장을 썼다. 어머니 병세가 더 나빠졌는가 묻고 네가 안오니 마음이 참 쓸쓸하다고 했다. 그 쪽지를 양자네가 살고있는 쪽 숙자한테 전해달라고 보낸 것이다.

그것이 커다란 실수였다. 숙자가 그냥 전한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 뜯어 보고 소문을 퍼뜨려버렸다.

순진한 나는 그것도 모르고 처음 며칠동안 양자한테서 답장을 기다렸다. 그러나 답장은 안오고 내가 써보낸 쪽지 속의 몇구절을 아이들이 큰소리로 외오구 다니는 것이었다.

그 때서야 나는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벌써 일은 엎질러진 것이고 양자와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다행히 겨울방학이 시작되어 우리는 아이들의 놀림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양자네 어머니는 다음해 양자가 학교를 졸업한 뒤 곧 돌아가신 것으로 안다.

우울한 일들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달리기를 어찌나 잘 했는지 전교 남학생까지 포함해서 가장 앞섰던 수임이란 애가 6학년을 졸업하지 못하고 시집을 간 것이다. 비록 나이는 조금 많이 17살이었지만 국민학교 여학생이 시집을 가야 했던 사정은 전쟁과 가난 때문이었다. 제대로 형식도 순서도 없이 우리는 그렇게 버려졌던 것이다.

1년 뒤에, 수임이가 갓난아기를 업고 있는 것을 장터에서 꼭 한 번 봤지만 그 뒤는 모른다. 지금도 그때 수임이가 아기를 업고 힘든 보따리를 이고 걸어가던 모습이 생각나면 가슴이 메어진다.

그해 겨울, 나는 처음으로 내 손으로 지게를 만들었다. 달영이란 애와 함꼐 온 산을 누비며 지게감이 될 만한 소나무를 찾아다녔다.

지게감이 되는 소나무는 꼭 양지쪽 소나무여야 하고 껍질이 검은 것보다 붉은 소나무가 더 좋다고 했다. 물론 옹이도 적고 곧은 나무여야 한다.

닷새를 돌아다닌 끝에 몇그루의 소나무를 베어왔다. 가지를 약간 윗쪽으로 휘게 하고는 칡덩굴로 비틀어지지 않도록 묶어 양지쪽에 세워뒀다. 본래는 응달에 오래오래 말려야 하는 건데, 시간이 없어서 빨리 말리기 위해서다.

나는 아버지 지게를 본따거 만들기 시작했다. 낫과 톱과 자귀와 끌로 이틀 동안 꼬박 일을 해서 지게가 만들어졋다. 그런데 지게에는 세장이 세 개가 있는데 윗세장과 아랫세장을 끼우는 구멍을 약간 기울게 파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지게가 위쪽 아래쪽이 수직으로 서 있게 되어 다시 파야 했다. 그것만 실수를 했지 다른 곳은 흠없이 잘 만들어졌다.

어른들이 보고는 아주 잘 만들었다고 칭찬을 했다.

나는 베다 놓은 지게감으로 동생것도 만들었다. 속으로 혼자서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 지게로 나무를 해다 팔아 중학교 학비를 모아보려 했던 것이다.

우리는 산에 가서 갈비(불쏘기개로 쓰는 솔잎)를 긁어다 장에 내다 팔았다.

보통 우리들의 나무는 7천원에서 8천원을 받았다. 날이 궂어서 나뭇짐이 덜 나오는 날은 1만원을 받기도 했다.

동생의 것도 합치면 15,000원쯤 되어 두 번을 팔면 암탉 한 마리를 살 수 있었다. 참으로 힘든 노동이었지만 앞날에 목표를 세운 일은 힘든 것보다 보람이 앞선다.

암탉이 5마리 되었다. 그러나 중학교는 결국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다.

나는 1년 다음에 가기로 결심을 하고 닭을 열심히 키웠다. 다섯마리 암탉을 모두 병아리를 깨었더니 여름까지는 백 마리가 훨씬 넘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우유장수 처녀처럼 나도 송아지를 사고 그 소를 키워 송아지를 낳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그것도 허물어지고 말았다. 닭 전염병이 덮친 것이다. 전쟁과 함께 미국에서 따라 들어온 이 새로운 전염벙은 온 마을의 닭을 삽시간에 쓸고 갔다.

백 마리가 넘는 크고 작은 닭이 일주일도 못가서 모조리 죽고 마지막 조그만 병아리 한 마리만 남았다.

우리는 온 식구가 엉엉 울었다.

3.

결국 그해 여름부터 객지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때는 읍내였던 ○국민학교 뒷문 옆에 있는 가게의 점원이 된 것이다. 공부 잘하고 성실하다는 소문을 듣고 가게 주인이 사람을 보내왔다.

가까운 읍내니까 오히려 부모님들은 안심이 된다고 애써 보내려하는 눈치여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갔다.

주인은 자수성가를 해서 성공한 알뜰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돈을 버는 사람들 쳐놓고 그 방법이 바르지가 않았다.

나에게 판자집 가게를 따로 마련해서 고구마와 담배를 팔게 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6.25 전쟁떄 피난을 가면서 길바닥에 앉아 사과를 팔아본 일이 있지만 이런 가게를 혼자서 지키는 건 처음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가게문을 열고 청소를 하고 방석을 털어 가게 앞에다 깔고는 고구마를 쏟아부어놓는다. 하루 너댓 가마니는 팔았다.

나는 손님들에게 고구마를 후하게 줬다. 그래야만 손님이 많이 찾아 올 것이기 떄문이다.

주인집에서는 처음부터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고 그대로 따른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보름쯤 지나서 주인이 나를 불렀다. 고구마가 많이 축이난다는 것이다. 가마니째 달아 본 무게와 소매로 판 고구마의 무게가 많은 차이가 난다고 했다. 그러니 앞으로는 너무 많이 덤으로 주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했지만 내가 기록하고 있는 매상 장부를 봐도 고구마는 갑절이 넘는 이윤이 나오고 있었다.

한주일 뒤에 주인이 또 불렀다. 이번에는 고구마를 저울질할 때 요령껏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범을 보여주었다. 1관씩 표시를 해 둔 작은 막대저울로 고구마를 달 때, 손잡이를 잡고 새끼손가락 끝으로 약간만 고구마가 얹힌 쪽으로 눌러주면 ㅗ딘다는 것이다.

나는 다음날 혼자서 그 요령을 시험해 보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커다란 속임수였다. 새끼손가락의 중간 마디로 저울대의 머리를 누르기는커녕 약간만 건드려도 3kg만으로도 1관이 되었다.

1관은 3.75kg이다. 그것을 3kg만으로 1관이 되게 속여서 파는 짓이다.

나는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도무지 손이 떨려서 고구마를 달 수 없었다.

그런데 주인이 또 불렀다. 왜 시킨대로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나는 시킨대로 못했으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주인과 머슴 사이는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어느새 노예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신분의 차이가 없어졌다지만 역시 인간사회는 계급이 있기 마련이다.

가난은 양심도 지키지 못하며 거짓을 강요받아야만 된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주인은 나도 모르게 사람을 시켜 나에게 고구마를 사러보낸 것이다. 그게 바로 스파이 행위다. 한두번이 아니라 매일 한번씩 사람을 바꾸어 보냈던 것이다.

돈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돈은 돈만 버는 것이 아니라 악을 낳고 퍼뜨리는 악마다. 나는 그래서 그 돈에 복종했고 내 조그만 양심을 속이게 되었다.

나에게 고구마를 사러 오는 사람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날고구마를 한두 관씩 사다가 쪄서 파는 고구마장수들, 한 끼니를 잇기 위해 한 관씩 사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무게를 속여야 했다. 고구마 두세 개씩은 속이게 되었다. 낱개로 쪄서 파는 아주머니는 될 수 있으면 작고 때깔이 좋은 걸 골랐다. 그렇게 작은 고구마라면 다섯 개도 속일 수 있었다.

처음 얼마동안은 두렵고 떨리며 괴로웠지만 차츰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나도 악마들의 세상에 길들여진 것이다.

아편이나 히로뽕만이 마약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게 다 사람의 올곧은 마음을 비뚤어지게 하는 마약이다. 종교까지도 그래서 아편이라 했을 것이다.

아무리 훌룡한 일도 정신을 잃고 맹목적으로 끌려 가면 모두 악마로 둔갑해 버린다. 사람은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지 항상 꺠어 있어야 한다.

내가 고구마 파는 데만 정신을 쏟고 있는데, 한 번은 시골 어느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꼬기 꼬기 접힌 돈을 꺼내더니,

“학상, 아래 장날 고구마 사갔는데, 글쎄 정신도 없제. 돈도 안주고 그양 갓뿌릿잖나.얼매나 미안튼지 어서 갖다줘야 된다 된다. 하면서도 이뤃기 늦어부렀대이.”

하며 고구마 1관 값을 내어주는 것이었다.

세상이란 또 이렇기도 했다. 돈은 돈을 낳고 그 돈이 쌓이면 악을 낳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그러지 못한다.

장날이면 고구마가게가 무척 붐빈다.

그러면 서로가 정신을 맇고 사는 쪽도 파는 쪽도 돈을 주고 받는 걸 잊을 떄도 있다.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일, 그리고 나는 수많은 사람을 속이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 아주머니는 이 고구마 1관값 때문에 이렇게 며칠동안 괴로워했다니 참으로 바보스러웠다. 그까짓 모른 척 지나가버려도 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살아가는데 이득이 될텐데, 왜 이런 바보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러면서 그것이 아주 재미있는 일로 생각했다. 그래서 옆집 구멍가게 아주머니께 자랑삼아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도 장사꾼이었다.

“학생, 그럼 그 돈은 없던 거나 마찬가지니 학생이 써버려요.”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얼른 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정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그럼, 그 돈 아주머니가 맡아주세요.”

“그래, 내가 맡아놓을께 언제든지 쓸 데가 있으면 달라고 해.”

나는 고구마장수 주인이 가르쳐준 요령을 따르는 것만이 아니라 나대로 요령을 이요할 줄 알게 된 것이다. 이렇게만 계속했더라면 나는 커다란 장사꾼이 되어 어느 기업의 사장님 못지 않는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는 없었다.

어느날, 고구마 가게에 뜻밖에도 어머니가 찾아오신 것이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가을운동회가 있어서 고구마를 쪄서 팔아보려고왔다고 했다.

나는 어머니꼐 고구마 두 관을 팔면서 하마터면 여느 사람들에게 하듯이 속일 뻔 했다.

어머니를 보내놓고 나는 그때서야 가슴이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그날 밤 판자집 가게방에 혼자 자면서 거의 밤을 지새우다시피 울었다.

내가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가 생각났다. 돈 때문에 결국은 나쁜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로 팔려 간 오가와 미메이의 ‘빨간 양초와 인어’의 주인공, 금으로 장식된 왕자의 몸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온몸을 부수어 이웃을 돕는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빵 한 조각을 춤치다가 19년이나 옥살이를 하는 ‘장발장’의 이야기, 고구마 한 개를 가지고 서로 다투다가 힘센 토끼한테 다 빼앗기는 이이솝의 ‘생쥐 이야기’, 내 가슴에는 그렇게 아름다운 동화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말이 없고 외로웠다. 그게 천성이었던 것인지 모른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왜 그토록 외로웠는지.

고구마를 팔면서 가끔 아는 사람이 지나가다나 나를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그 중에도 국민학교 시절 교장 선생님이 한 번은 지나치다 나를 보셨다. 교장 선생님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기까지 하셨다.전교 수석으로 졸업한 아이, 비록 시골국민학교지만 1등을 했던 나를 몹시 아껴주시던 것을나도 알고 있었다.

“너는 계속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교장 선생님은 한참 서서 측은하게 바라보시다가 돌아가시던 것이 평생잊혀지지 않는다.

결국 나는 고구마장수집을 떠나기로 했다. 갑자기 두려워진 것이다.

나는 사람이 착하게 살아가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나는 어릴적부터 부리전했다.

학교만 파하면 돌아와서 무엇을 하던지 일을 했다. 집둘레에 빈터가 있으면 일구어 고추도 심고, 물을 길어다 부어가면서 미나리도 심었다. 꽃밭도 만들고 애써 과일나무 접붙이기도 배웠다.

텃밭에 내가 가꾼 고추가 주렁주렁 열리면 이웃 아주머니들이 풋고추를 따가지고 갔다. 그게 그렇게 즐거웠는데, 이렇게 나쁜 길로 들어서게 되다니.

내 작은 소견으로는 그게 모두 내가 잘못한 것으로 알았다. 어떤 나쁜 꾀임도 거부하고 물리치면 되는 것으로 알았다. 끝까지 성실하게 살면 언젠가 보상을 받게 된다는 감삼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뒷날 또 한 번 크게 속아넘어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주인에게 집에 다니러 가게 해달라고 했다. 용기가 없어 그만 두겠다는 말을 못했다.

집에 간다니까 옆집 구멍가게 아주머니가 전에 감추어뒀던 고구마 1관 값을 내주었다.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그것을 받았다.

그 돈은 주인 집에서 얻은 용돈을 보태어 어머니께 양동이를 하나 사다드린 것으로 기억된다. 그 바보 같이 착한 아주머니의 돈이 이렇게 오랜 세월 잊혀지지 않고 머리에 남고 가슴에 남아 떠나지를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착했던 아주머니는 춧날 내가 쓰는 동화 속에 자주 등장하여 살아남게 되었다. 어떤 모습이었는지 지금은 그때 그 꼬깃꼬깃 접힌 종이돈을 건네주던 거칠고 무딘 소만이 기억되는 아주머니지만 내게는 살아 있는 천사였다.

4.

집에 돌아오니 마침 아랫마을 예배당에 조△△라는 교회 선생이 성경구락부를 열어놓고 중등부 학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물론 낮에는 시간이 없고 밤에 나가 공부하는 야간학교였다.

거기서 영어 알파베트도 배우고 수학도 공부했다. 수업료는 한 달에 한 번씩 나무를 해다 드리면 되었다.

조△△ 선생은 이 조그만 시골교회 전도사 일도 겸하고 있고 서른 살이 가까운 나이에 사범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교회에서 받는 보수는 교인들이 모은 좁쌀 한 말이 될 때도 있고, 조금 넘을 때도 있다고 했다.

아침 일찍 좁쌀로 끓인 죽을 한 그룻 먹고 50리 길을 걸어서 학교에 갔다. 물론 도시락을 쌀 수 없어 종일 굶고는 저녁에 다시 걸어서 돌아왔다.

한 번은 야간학교 수업시간이 함참 지났는데도 오지 않아 우리가 동구 밖까지 마중을 갔더니 어두운 길을 터벅터벅 걸어오는 것이었다.

며치 뒤에 그날 늦었던 까닭을 들려 주었다. 중간쯤 되는 곳까지 걸오는데 갑자기 앞이 캄캄해지며 그냥 털썩 주저앉아버렸다는 것이다. 이래서는 안된다고 간신히 정신을 차려 거의 기어가듯이 어느 집에 찾아가 먹을 것을 달라고 했더니 그 집에서도 방금 저녁을 다 먹고 숭늉 한 양푼이 있는데 그거라도 마시라고 내어주더라고 했다. 그래서 그 숭늉을 밑에 찌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다마셨더니 겨우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해 첫눈이 내리던 날 나는 동생과 둘이서 산에 가서 나무를 했다. 어니께서

“날씨가 궃으니 선생님한테 나무를 해다 그려라.”

했기 때문이다. 점심나절까지는 흐리기만 하던 날씨가 오후부터 눈송이가 떨어지더니 점점 쏟아져 함박눈으로 변했다. 겨울해는 짧고 눈오는 날은 더욱 빨리 저문다. 우리는 나무를 지고 아랫마을 산밑에 있는 조 선생님댁으로 갔다.

마침 사모님은 아기를 업고 친정에 가시고 선생님의 어머니와 둘만 계셨다.

뜻밖에 나뭇짐을 지고간 우리를 보자 할머니와 선생님은 어쩔 줄 모르게 미안해 하는 것이었다. 눈이 벌써 쌓여 발목이 빠졌다. 선생님은 우리를 끌고 들어가 저녁준비까지 했다.

저녁밥은 안남미로 지은 밥과 고추가루도 아무것도 넣지 않고 그냥 물을 붓고 끓인 된장뿐이었다.

비록 안남미지만 쌀밥은 누구한테나 귀한 것이었다. 밥을 먹고나자 선생님은 시렁에 얹힌 보퉁이를 모조리 끌러놓고 해지고 줄어든 바지 두 개를 꺼내놓았다. 구멍이 난 엉덩이를 기워 입으라고 넙적한 헝겊을 맞추어 가위로 오려주기까지 했다.

조 선생님은 부지런하고 자상하며 무척 열정적이였다. 수업시간에도 교과공부보다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때 선생님은 대학을 가기 위해 입시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한 번은 칠판에다 수학문제 하나를 써놓고 누가 풀어볼 사람이 없느냐고 했다.

내가 잠깐 쳐다보니 쉽게 풀 수 있어 손을 들었더니 나와서 풀으라고 했다. 지금 그 문제 전체를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 답은 -4였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면서, 이건 작년(1952년)도 ○대학 입학시험에 나온 건데 선생님은 두 시간 동안이나 걸려 간신히 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도 어려워 학생들에게 화제를 삼아보려 문제를 써서 보였는데 내가 금방 풀어보이자 약간은 맥이 풀리는 기분이셨다.

그로부터 조 선생님은 기회만 있으면 나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상급학교에 진학하다록 권했다.

5.

그때만 해도 역시 공부는 인생의 최후 수단이며 목적이였다. 물론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공부하고, 그래서 나라를 위하고 사회를 위해 일한다는 더 넓은 뜻이 담긴 목적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뒷날의 일이다.

사실 지식이란 사람에 따라서는 선하게 쓰일 수도 있고 나쁘게 이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많이 배운 사람이라고 더 훌륭하고 착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 세상의 모든 교육이 어떻게 살아야 더 선하게 아름답게 살아가겠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좀더 편리하고 풍요하게 살기위한 교육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물질적 풍요와 편리는 지나쳐서 쾌락으로 어긋나버린 것이다.

그래서 많이 배운  사람은 더 많이 차지하고 더 많이 편하게 살고 배우지 못한 사람은 가난하고 고달프게 살아야 한다. 공부한 사람이 만들어놓은 문명의 도구는 짧은 시간에 많이 생산할 수 있어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식량만은 그렇게 못한다.

그러면서 적어도 볍씨를 뿌려 거두기까지 6,7개월이 걸리는 쌀의 가치보다 기계값이 더 비싸다. 곡식 가운데 가장 빨리 수확할 수 있는 것이 메밀과 쉰날거리라고 부르는 조가 있다. 씨를 뿌린 뒤 50일만에 거둘 수 있다고 해서 이름이 쉰날거리인 것이다.

농민들은 쉽게 거둬지는 이런 곡식은 그렇게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보리는 가을에 심어 이듬해 여름에 거둔다. 그래서 보리쌀은 겨울을 난 강한 곡식이라 해서 쌀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

의식주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은 역시 먹는 것이며 다음이 입을 것과 잠잘 곳이다.

봉건시대때도 양반들은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더 훌룡하고 죽도록 일을 하는 농사쑨이나 도구를 만드는 장인들은 홀대를 하였다.

과학문명시대도 마찬가지다. 공부는 오직 편하게 살기 위한 수단이다.

배우면 영리해지고 못배우면 바보가 되는 것이지 배우면 착해지고 못배우면 악해지는 건 절대 아닌대로 말이다.

우리나라보다 조금 더 앞서서 배운 일본은 더 빨리 영리해져서 못배운 우리 조선을 강제로 빼앗았다. 그들이 진정 선한 공부를 했더라면 못배운 조선을 거짓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참되게 보살펴 주어야만 했을 것이다.

선진국이란 먼저 배워서 강해진 나라이며 후진국을 이용해 먹는 도둑일 수밖에 없다. 일본이 그랬고 미국이 그랬고, 다른 모든 선진국도 그렇게 후진국을 잡아먹은 것이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배우면 강해져서 못배운 사람을 등쳐먹는 것은 똑같지 않는가? 배운 사람이 못배운 사람을 등쳐먹으니 못배운 사람은 억울해서 뺴앗기지 않으려고 따라서 배우려 애쓰고, 그러니 지식이란 살아가기 위한 무기일 수밖에 없다.

무지했던 사람들은 달나라엔 계수나무가 있고 옥토끼가 떡방아를 찧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배운 사람은 달나라엔 공기도 없고 물도 없는 벌거숭이 사막이라는 걸 밝혀내었다. 똑똑한 사람은 물을 곧이곧대로 보고 있지만 마음은 얼마나 황폐한가.

달나라에 계수나무가 있고 옥토끼가 살고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미개하고 어리석었지만 마음 속은 훨씬 아름다웠다.

그렇다면 진정 어리석은 쪽은 누구인가? 우리 어른들이 자식을 가르치는 목적이 남에게 뒤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고 나아가서는 더욱 앞장서서 지배하라는 것일게다.

이렇게 말하면 공부라는 것이 온통 나쁜 것뿐이라고 주장한다고할지 모르지만, 꼭 그렇다는 것만은 아니다. 슬기를 넓히는 공부, 좀더 아름답게 생각을 키우는 공부, 다 함께 도우며 살아가는 공부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공부는 수학점수나 영어점수를 더 많이 따서 되는 공부가 아니다. 나는 그런 것을 구별짓자는 주장이다.

수세식 변소를 만들면 화장실은 깨끗해지지만 강물은 더려워진다. 내 집안을 깨끗하게 하려다가 모든 사람, 짐승, 물고기까지 더러워져 죽게 되는 환경오염을 생각하지 않는 공부는나쁜 공부이다.

노래 공부를 해도 사람의 마음을 착하게 하는 노래를 만드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노래를 만드는 사람도 있다. 과학도 마찬가지고 의술도 마찬가지다.

내가 8.15해방을 맞았을 때 일본의 어느 시골에서였다. 그 때 바로 옆집에 살고 있던 일본 사람이 우리에게 한다는 말이

“이젠 우리 일보은 이렇게 납작해졌고 당신네들은 이렇게 높아졌소.”

하면서 손짓으로 땅과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떄까지만해도 우리는 그들과 우리는 일본인과 조선인이란 차이만 생각했지 이웃끼리 그렇게 높거나 낮거나 한 사이로 생각지는 않았다. 아홉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갑자기 일본인들이 비굴할만큼조선 사람들에게 싹싹해지는 걸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반대로 조선 사람들은 우쭐대는 것도 싫었다.

금방 세상이 뒤바뀌어졌다고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는건가? 그렇다면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며 억압했을 땐 그들은 모두 하늘이이었고 우리는 밟히는 지렁이였다는 해답이 나온다. 정말 그런 것일까?

힘이 인간을 지배하고 자연을 파괴하며 목숨을 짓잛아버리는 것이라면 그건 힘이 아니라 바로 악마다. 같은 힘이라도 선하게 쓰는 힘이야말로 선이며 사랑이다. 그러니까 무조건 힘을 기르는 것을 나쁘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하게 쓰일 수 있는 힘이라면 더욱 부지런히 기르고 쌓아올려야 한다.

사람들의 하루 일과를 세 등분으로 나누면 8시간 잠자고 8시간 일하고 8시간은 쉴 수 있다. 마지막 쉴 수 있는 8시간을 어떻게 소중하게 쉴 수 있는가가 문제다.

옛날에는 주경야독이라 해서 낮에 밭갈고 밤에 책을 읽는, 참으로 보람된 하루를 보내는 분들이 있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방법은 바로 이런 생활이 아닌가 싶다.

지금은 산업시대여서 밭을 가는 것은 불가능한 사람이 많지만 낮에 8시간 일하고 밤에 책을 읽고, 가끔씩 이웃끼리 모여 정담도 나누고 걱정도 나눈다면 세상은 그런대로 평화로워질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안정을 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변화를 바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아니면 맹목으로 변화라는 말에 편승해서 환상에 빠져더는지도 모른다. 결국 인류역사는 이런 변화를 추구하다보니 혼란과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해방 직후에 어느 집 머슴이, 주인이 걸핏하면 “이놈아, 저놈아” 부른다고 해서 그 집을 나와버렸다. 그러자 그 집 주인어른이 달려 나와 머슴을 붙잡고 한다는 소리가

“두 번 다시 이놈 저놈 안 할테니까 가지 마라 이놈아.”

했단다. 제버릇 개 못준다고 오랫동안 상저이 머슴에게 하던 말버릇이 하루아침에 고쳐지는 것은 아니었다.

머슴은 더욱 화가 나서

“이놈 소리 안 한다면서 왜 자꾸 이놈아 하는가요?”

따져도 여전히 주인은

“그래, 다시는 안 할께 이놈아.”

했다니, 그래서 결국은 머슴은 가버리고 그 해 농사짓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단다.

그 머슴이 그렇게 떠나간 뒤, 근처에 머슴을 데린 주인들은 한결같이 머슴에게 하는 말이 공손해졌다. 그러니 제일 먼저 반항을 하고 떠나가버린 머슴은, 머슴사회에서는 선구자며 혁명가였다.

혁명가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잘못되고 공정치 못한 일이면 스스로를 희생해서라도 바로 고쳐나가는 일이다. 개인의 사소한 일이나 사회와 국각의 일 모두가 같은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 공부하는 마지막 목표다.

자기가 고용하고 있는 일꾼을 고용주의 욕심대로 나쁘게 이용하는 것은 절대 용서해서는 안된다. 주인과 일꾼이기 전에 사람과 사람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

읍내 고구마 장수집에서 내가 저울질을 속여 손해 본 사람들이 수백명이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부정축재를 한 몇몇 사람들 때문에 수많은 백성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건 학교에서 배우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돈이 많은 사람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이 부정을 하면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은 따라서 나쁘게 된다. 인간들의 사슬이란 바로 돈과 권력으로 올가매는 일이다.

일제 36년과 해방과 6.25 전쟁을 겪으면서 나는 사람답게 사는 길이 얼마나 괴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즘도 버스정류장에서 흔히 보지만 나란히 줄지어 타기보다 서로 밀치며 앞서 타려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런 혼란 속에서 누구 하나가 질서를 지키려다 보면 그 사람은 맨 뒤에 타거나 아니면 만원일 때 버스를 타지 못하게 된다. 시간을 맞추어 맨 먼저 와서 기다려도 뒤에 온 사람이 밀어배러리면 먼저 와서 기다린 보람도 없다.

가톨릭 시자이며 나가사끼 의과대학 부속병원 의사였던 “나가이다까시”선생은 원자탄이 떨어지는 순간의 일을 나중에 이렇게 기록했다.

“달아나느 것입니다. 어쨌든 달아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내러던지고 달아는 것입니다. 즉시 뛰어달아나는 것입니다. 일이라든가 책임이라든가, 의무라든가, 의리라든가, 인정이라든가, 재산이라든가… 그런 일체를 다 내어던지고, 내 목숨 하나 살릴 것만을 생각하고 폭심에서 멀리 멀리 달아나는 것밖에 살아남을 방법은 없습니다.”

나가이 선생은 원자벌판에서는 모두가 짐승이 될 수 밖에 없다고 가슴아프게 생각하고 있지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짐승으로 살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 혼자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친구도 이웃도 다 뿌리쳐야 하고, 나 혼자 취직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수백명 수천명을 밀어내버리고, 더 많은 땅을 가지기 위해 집없는 사람을 산등성이나 난지도로 몰아내버리고, 자가용을 타고 좁을 길을 지나가면서 무거운 짐을 든 사람들을 한쪽으로 비켜서게 하고, 돈을 벌기 위해 큰 기업체들은 공장폐수를 쏟아놓아 더러운 물을 마시게 하고, 어디 한군데 사람다운 곳이란 없어졌다.

6.

1953년 겨울, 나는 또다시 집을 떠났다. 그 때, 우리 집은 농토도 집도 없어 결국 스스로 살아갈 길을 개척해야 할 형편이었지만, 그것보다는 고학이라도 해서 상급학교에 진학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때의 일은 다른 곳에서 썼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만 두기로 한다.

4년 뒤에  내가 폐결핵과 늑막염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결국 30년이 넘도록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병을 앓으면서 나는 언제나 건강해지면 조그만 논과 밭에서 농사를지으며 될 수 있으면 결혼도 하고 아기도 키우고 가난하더라도 산새와 들꽃과 함께 어울려 살고 싶었다. 그것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라 믿었다.

지금은 그 모든 걸 다 포기했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자연과 인간과 하느님을 함께 섬기며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혹시나 십대의 어린 나이에 좌절을 겪는 청소년이 있다면 경쟁사회에서 벗어나 가난한 인생을 살도록 권하고 싶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먹는 것 입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잘못된 향락은 더 큰 고통이 따른다는 것,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은 푸른 하늘밑에서 8시간 일하고 이웃과 더불어 가난하게 사는 것 뿐이다.

부처님도 그렇게 가르쳤고 예수님도, 그리고 앞서 간 성현들이 모두 그렇게 살며 우리에게 권했다. 불교신자이면서, 누이동생이 믿었던 가톨릭의 하느님을 함께 섬겼던 일본의 농민시인 미야자와 겐지의 시 한편을 마지막으로 적으면서 이 글을 끝을 맺겠다.

비에 지지 않고

비에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와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도 없이

절대 화내지 말고

언제나 조용히 웃는 얼굴로

하루 현미 너 홉과

된장과 나물을 조금 먹고

모든 것을

자기 계산에 넣지 않고

잘 듣고 보고 알아서

그리고 잊어버리지 말고

들판 소나무 숲속 그늘에

조그만 초가지붕 오두막에 살며

동쪽에 병든 어린이가 있으면

가서 간호해주고

서쪽에 고달픈 어머니가 있으면

가서 그의 볏단을 져다드리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무서워 말라고 위로하고

북쪽에 싸움과 소송이 있으면

쓸 데 없는 짓이니 그만 두라고 하고

가뭄이 들면 눈물을 흘리고

추운 여름엔 허둥허둥 걸으며

모두한테서 멍텅구리라 들으며

칭찬도 듣지 말고

괴로움도 끼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미야자와 겐지는 그렇게 살다가 37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다. 그러나 1백세를 산 사람보다 더 많이 산 것이다.

출처 : 날자, 깃을 펴지 못한 새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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