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양에는 하느님이 용서했다 말 한마디로 편하게 사는 사람이 나온다. 나는 이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용서는 당사자와 하느님 사이의 문제인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용서는 상대방이 용서해주어야 하는 것.
하느님에게 죄를 지은 것과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것의 가장 큰 차이는 절대적 용서의 대상과 용서를 인정해주는 대상의 차이다. 진정한 회개가 따를 때 하느님이 용서하지 못하는 죄는 없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럼 하느님이 용서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용서받은 것인가? 나는 용서받기 위해서는 용서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하느님이 용서하든 사람이 용서하든의 문제가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삶에 대한 문제다.
믿음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 믿음이다. 때문에 기독교 신앙안에서의 용서는 삶이 수반되어야 한다. 삶이 수반되지 않는 믿음과 용서가 다 무슨 소용인가. 그것은 거짓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남은 쉽게 용서하지 못하면서 나는 쉽게 용서받는다. 싸구려 기독교가 낳은 이 시대의 비극이다. 용서라는 거룩한 행위가 면피용으로 둔갑해버리는 그 순간 기독교라는 이 유서 깊은 종교는 싸구려 사이비 종교가 되어 버린다. 그것은 용서라는 이름의 면죄부를 남발하며 싸구려 삶을 살아가는 우리 믿음의 모습이다.
하느님이 용서하셨는데 너가 뭔데? 이런 싸구려 답변을 듣기 위해서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싸구려 믿음을 믿음이라 착각하는 현실. 교회가 병들어가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믿음이 싸구려인데, 어떻게 교회가 싸구려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