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리의 어린시절 (1920~1938)

아루투르 베네데티 미켈란젤리는 1920년 1월 5일 이탈리아 북부 브레시아 근처의 작은 마을인 오르치누오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지우제페 베테데티 미켈란젤리는 법관 출신인 엄격한 인물이었지만 피아노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고 제자를 가르칠 정도로 음악애호가였다. 미켈란젤리는 세 살이 되던 해 아버지에게서 피아노를 배웠고, 어머니에게서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처음에는 바이올린을 배웠지만 4살 무렵에 폐렴에 걸려 피아노로 방향을 바꾸었다.


미켈란젤리는 4살이 되던 해 브레시아 음악원에서 정기적인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5살이 되던 해 미켈란젤리는 다른 음악원 학생들과 같이 교내 음악대회에 참가하였고 이 때 유명한 일화를 남긴다. 어린 미켈란젤리는 대회에 참가하여 무대에 모습을 나타낸 후 잠시동안 피아노 의자 앞에 아무 말 없이 서있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무대뒤로 되돌아왔다. 사람들은 그가 겁을 먹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를 다시 무대 위로 올려보냈다. 그러나 어린 미켈란젤리는 잠시 후 다시 무대 뒤로 되돌아왔다. 아무 말 없이 이러기를 여러 번 반복하던 중 마침내 누군가 의자의 높이가 어린 미켈란젤리가 올라가기에는 너무 높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를 안아 의자에 올려주었다. 그때서야 미켈란젤리는 아무 표정없이 조용하고 완벽한 연주를 시작하였다.


이 일화는 그의 외골수적인 기질이 어려서부터 나타났다는 것을 말해주는 유명한 일화이다. 훗 날 에도 미켈란젤리는 그의 연주에 열광하는 청중에게 결코 웃음을 지은 적이 없었고 다만 공손하게 인사할 뿐이였다. 그는 청중의 열광이나 박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언제나 냉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연주에만 몰입할 뿐이였다. 그에게 있어 유일한 관심은 작곡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청중에게 전달하는 것이지 청중의 의도대로 작품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였다.


다음날 지방신문에 이 일화와 함께 어린 꼬마인 미켈란젤리가 놀라운 연주로 청중의 탄성을 자아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 기사에서 감정과 음악을 천재적 직관을 통해 청중과 소통하는 그의 음악적 감각이 어려서부터 남달랐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후에 그는 밀라노의 음악원으로 진학해 작곡과 피아노 그리고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는 밀라노에서 1934년 열 네 살의 나이로 피아노 연주의 디플롬을 받고 공식적인 피아니스트의 삶을 시작하였지만 집안의 권유로 대학에서는 5년동안 의학을 전공하였고,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래서 그는 피아니스트이지만 특이하게도 의학을 전공하였고, 때문에 의사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켈란젤리는 피아노 외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제네바 콩쿨을 우승하였던 19살 당시 그는 음악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유명한 자동차 경주도 휩쓸었다. 바이올린에도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 정통하였다. 훗 날 미켈란젤리는 인터뷰에서 그의 피아노 소리는 바이올린에서 찾아야 된다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미켈란젤리는 가정용 피아노도 아닌 연주회용 풀 사이즈 그랜드 피아노를 분해했다 다시 조립할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피아노의 물리적인 속성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미켈란젤리의 놀라울만큼의 정확하고 치밀한 연주는 피아노의 물리적 속성을 잘 알고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병약하였지만 등산과 스키 실력도 일류급이었다. 병약하여 운동을 기피하였던 미켈란젤리였지만, 산을 매우 사랑하였다. 그래서 산과 관련된 운동에서만큼은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후에 그는 알프스의 산사람들을 모아 합창을 지휘하며 몇몇 곡들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1938년 6월, 그의 나의 18살 때 미켈란젤리는 벨기에 바이올린니스트 유진 이자이를 기리기 위해서 창설된 벨기에 브뤼셀의 제 2회 이자이 콩쿠르에 참석한다. 비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이 대회는 처음에는 바이올린니스트들만을 위한 대회였다. 첫 대회 우승자가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였고 에밀 길레스는 두 번째 대회부터 신설된 피아노 부분 우승자였다. 이 대회에 참석한 미켈란젤리는 관객열광적인 호응에도 불구하고 이 대회에서 고작 7위에 머물렀다. 그것은 루빈스타인이 미켈란젤리에게 낮은 평점을 주었고, 심지어 이탈리아 심사자들은 그에게 0점을 주었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대회를 후원하였던 당시 벨기에의 여왕 엘리자베드 여왕은 미켈란젤리의 화려한 연주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여왕은 따로 그를 불러 궁전에서 연주회를 가졌고 어린 피아니스트의 특별한 재능을 칭찬하였다. 다이아몬드가 달린 7자 모양의 커프스 단추가 미켈란젤리에게 수여되었고 여왕은 7은 그의 행운의 숫자가 될 것 이라고 말하였고 이는 얼마지나지 않아 실현되었다. 후에도 엘리자베드 여왕과 아루투르 베네테티 미켈란젤리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의 절친한 사이로 남게 된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