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목요일 성찬예배에 사용되는 교창과 응창을 선곡한 음반. 음반 표지에는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는 성찬예배라는 말은 정교회에서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 성찬전례나 성찬미사가 정확할 것 같다.
사회인께서 강력하게 추천하신 음반인데, 어제 밤에 듣고 오늘 다시 듣는다. 음악이 주는 이 거대한 감동과 함께 전례 전통 그리고 오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종교라는 틀 안에서 전례가 생기고 그 전례가 음악을 빌려 전통을 만들었다. 이제는 사라진 전통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 음악을 들으며 기독교 역사 안에서 예수를 생각하게 된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예수는 다르게 해석되고 이해되었지만,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그 근원적인 믿음의 중심에 예수가 있고, 그를 중심으로 아직도 믿음이라는 이 원형이 지켜지고 있다.
수백년도 전이고, 장소도 이역만리 저 먼 나라의 음악을 듣고 내가 이해하고 감동할 수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음악이라는 이 매혹적인 예술 장르가 가져다 주는 청각적인 감흥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더 나아가 이천년이 넘는 시대를 관통한 각 시대의 믿음이 어떻게 형성되고 만들어지며 오늘 날까지 이어지는지 그 전통에 대해서 내가 이제 눈을 떠 가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영원에 대한 갈망은 이렇게 위대한 전통을 만들었고, 그 전통속에서 우리는 이렇게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이건 인종 국경 시대 장소에 구애 받음 없이, 인간이 가진 본연적 불안과 질문에 대한 인간의 필사의 대답.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끝이기에 본 적도 없고 가본 적도 없는 그 영원에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에게 전례라는 전통이 가져다 주는 의미가 각별할 수 밖에 없다. 이건 틀에 짜인 형식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염원이 모여 만든 삶과 죽음에 대한 투쟁이다.
이런 전통의 이해 안에서 빅토리아가 중심이 된어 구성된 이 전례음악을 듣고 있자니, 조용히 다가와 내면을 두르리는다는 표현이 적당하다. 반주 하나 없이 인간의 목소리만으로 신에게 이렇게 가까이 다가갔다. 음악이 발달하고 악기가 발달하면서 보다 거대하고 복잡한 음악을 만들어내며 그에 맞게 모든 것이 변화했지만, 이 시대의 음악은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신에게 도달하고자 했던 가장 높았던 시대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대 종교의 의미가 지금의 의미가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음악.
이 음반을 들으며 내가 새삼 폴리포니 음악에 조금씩 눈과 귀가 열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고루하고 다 똑같은 음악으로 들렸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는 다양한 선율이 제각기 진행되면서도 이렇게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다는 생각을 한다. 화성의 시대가 오기전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쌓아올렸던 아름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