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30

나의 문어 선생님을 문어 대한 생태 관찰쯤으로 생각하고 봤다가 끝날 때 눈물 콧물 닦으며 밀려오는 경외감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주인공의 삶은 문어와의 만남이후 문어가 살아가는 다시마숲을 지키기 위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문어가 죽어 상어의 먹이가 되어 사라지기까지 인간적인 연민과 슬픔이 밀려오지만 결국 그 또한 자연의 일원으로 자연을 구성하고 그 자연을 위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위대한 순환의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간 수없이 다이빙하면서도 보지 못했던 그 생명을 품어 키워낸 다시마 숲을 보게 되고 어머니 자연을 느끼게 된다.

문어와의 교류에서 느끼고 배운 것도 적지 않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 운명에 대한 순명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그 숭고함이 자연의 순환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시간동안 반복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보이지 않는 그 많은 생명이 자연의 일부로 어머니 자연을 돌보고, 결국 어머니 품속으로 돌아간다.

채식을 하던 20대 초반 내 지난 날이 생각났다. 그 시절 어머니 자연에 품고 있던 내 경외감은 어디로 갔을까? 잊고 지내고 잃어버린 나를 생각하게 해주었다. 말마다 생각마다 습관적으로 내뱉던 그 많은 순간 순간이 나를 무디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때처럼 삶에 대한 치열함도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태어나고 싶어 태어나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생명과 죽음의 순환속에서 우리 모두의 삶은 저마다의 의미와 소명을 갖고 있다. 우리가 주체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는 착각에 휘말려 지구를 불바다로 만들고 있고, 코로나라는 역병도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결과.

세이모어 번스타인이 다가오는 죽음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운명에 순응하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순명은 그런 존재 본연의 모습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며, 인간은 지구라는 어머니 품속의 수많은 생명들의 순명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 살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생명의 희생속에서 일궈진 고귀한 가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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