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회개는 신이 용서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신도 회개하지 않는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전병욱은 스스로 용서받았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생각한다. 상당수 기독교인이 이런 삶을 산다. 하느님이 용서하셨으니 나는 이제 새사람.

하느님의 용서에는 구별이 없고 차별이 없다. 아무리 큰 죄도 회개 앞에 용서받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것이 인간과 비교되는 신의 자비이고 사랑이다.

그 용서는 누군가에게 써준 차용증을 소각하는 차원이 아니다. 이전과 이후를 구별하고 어둠과 빛을 구별하는 신의 사랑이다. 그렇게 때문에 용서 받은 사람은 용서 받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살아야하는 삶의 강제가 아닌,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살아가야 하는 삶의 자세인 것이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예외가 있다면 전병욱 목사 같은 사람. 이신칭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 기독교의 위대한 전통인데, 전병욱은 스스로 의롭다 함을 칭하는 자칭칭의자가 되었다. 이 시대의 새로운 트렌드를 창출하는 듯. 기독교를 스스로의 의로움과 용서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 이 사람에게 신의 용서를 빈다.

 

 

맛은 여러 기준중 하나일 뿐…

루왁 커피 기사를 보고 우울한 기분. 커피가 뭐라고 저따위로 커피를 만들어내는지 모르겠다. 맛이 좋은면 다 인가? 얼마전 달걀 파동 때 황교익씨가 자기는 좋은 달걀의 선택 기준이 맛이라고 했다. 이 또한 우울한 이야기지.

미국의 저명한 의사가 한 이야기중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다. 혀가 몸에서 주인 노릇을 하면 몸이 망가진다. 못 먹어서 병이 생기는 시대가 지나, 이제는 먹어서 병이 되는 시대. 이 말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시대. 동네 마트만 가도 이제 먹을 것이 산처럼 쌓여있다. 요즘 아이들이 먹을 것을 우습게 알고 먹다 버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현대인은 풍요라는 축복을 받는 동시에 질병이라는 저주도 동시에 받았다. 당뇨 환자가 이렇게 많은 시절이 우리나라를 넘어 인류 역사상 과연 존재한 적이 있었나 싶다.

맛은 결정의 한 기준일 뿐, 전부가 아니다. 맛이 전부라는 것은 무지의 소산이다. 그 맛을 위해서 마음 껏 농약치고 마음껏 살충제 뿌리고 마음껏 항생제 남용해도 되는 것일까. 다 먹지도 못할만큼 생산해서 버리는 것이 풍요인가?

좋은 음식을 먹는 것보다 바른 음식이 먹는 것이 건강을 유지하는 세상이다. 적게 먹고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잘 쉬고. 이렇게 간단하고 쉬운데 어렵다. 현대사회의 모순. 풍요가 넘치는데 병도 함께 넘쳐나는 세상.

미래는 암이 아니라 당뇨병의 시대가 될 것이다.

 

 

 

 

이덕무, 파스칼

자기전 이덕무의 글 하나 파스칼의 팡세 하나 씩 읽고 잔다. 자연스럽게 이덕무가 바라보는 세계와 파스칼이 바라보는 세계를 비교하게 된다.  이덕무 1741년 ~ 1793년,  파스칼 1623년 ~ 1662년. 이덕무가 한참이나 후대 사람.

이덕무는 당대 걸어다니는 백화사전으로 불려도 무방할만큼, 온갖 것에 관심이 많았고 당대 최고의 독서량을 자랑했던 사람. 그 시절 이덕무는 조선이라는 세계가 추구했던 이상적 유교 사회와 관점 자체가 달랐다. 그도 유학자였고 그 한계를 벗어나려 한 적은 없지만, 그는 당대의 주류가 받아들일 수 없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존재였다.

그런 이덕무도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관점에서 파스칼과 비교하면 우울해진다. 동서양의 격차는 청나라가 들어서기도 전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파스칼의 인간과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은 지금 봐도 무서울 정도다. 이렇게 냉철하고 합리적인 인간이 어떻게 그런 신앙을 가질 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될 지경.

파스칼의 팡세는 합리와 신앙의 영역에서 괴로워하는 지금 크리스찬에게 좋은 책이다. 얼치기 창조 과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권한다. 과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파스칼과 크리스찬 파스칼은 둘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