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 대한 회의

마녀의 고민을 읽다보니 새삼 공감되는 면이 있어 몇 자 적는다. 함석헌은 과학와 신앙의 싸움에서 영원한 승자는 과학이고 그래서 과학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함석헌은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인 신앙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짊어지고 갔다. 왜 그랬을까?

우주라는 이 절대적 영역을 이해해가는 인간의 능력을 볼 때마다 나의 종교적 신심이 미약해져 가는 것을 느낀다. 얼마전 중력파에 대한 설명을 담은 동영상을 보며 나의 이 신앙이 얼마나 초라해져가는지, 솔직히 말해서 이런 거대한 과학 앞에서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굳이 물리학과 같은 거대 담론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 해서 굳이 특별한 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특별한 의미가 담긴 것도 아니다. 기독교라고 해서 다른 종교에 비해 우월하다거나 더 특별한 것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 나는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

여기까지 오면 종교를 버려야 하는 것이 옳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 여전히 나는 신앙고백을 하며 성당에 나간다. 선한자들의 불행은 하느님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이 운영되는 원칙, 우연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일절 인간의 의지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죽고 살고 불행과 행운의 차이는 내가 선하고 악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공평한 우연의 문제. 여기에 다다르면 파스칼이 고민하고 방황했던 것 처럼 하느님의 영역을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 신이 되는 날이 오면 나도 신앙을 버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죽음을 건너 다다르지 못하는 내 마음을, 죽음 그 후를 건너고 싶은 내 생각을 진로를 바꾸지 못한다. 요즘은 이렇게 흔들리며 하느님을 의심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자였던 내가 기독교 신자로 개종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좀 신비한 종교적인 체험과 관련이 있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는 이 체험을 통해 하루 아침에 나는 불교도에서 기독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속에서는 우주의 한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보통성 그것이 가져다 주는 합리적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해준다는 성서 말씀과 달리 과학이라는 진리는 나를 더욱 더 불편하게 만드는 것.

나는 아직 죽음을 뛰어넘는 인류의 필사 노력이 담긴 종교를 부정하지 못하겠다. 그것은 나 자신을 나 스스로가 부정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나라는 차원을 넘어 인류가 그토록 갈구했던 세계는 결국 인간이 다을 수 없는 곳에 있다고 믿는다.

 

커피 단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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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참 오묘한 것이 로스팅 할 때만 온도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커피를 내릴 때만 온도가 중요한 것이 아님. 마실 때도 온도가 중요함. 뜨거울 떄 미지근 할 때 식었을 때 각각 그 맛이 다른다. 각각 그 상태에 따라 마시기 좋은 원두도 다르다. 게이샤 같은 경우는 식었을 때도 맛이 좋다. 그 나름이 맛이 있는 것. 이런 원두를 만나면 기분이 참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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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가 보내준 과테말라 리오 아리바. 아프리카 커피를 선호하는 나는 중남미 커피에서 거의 대부분의 경우 만족을 느껴본 적이 없다. 유일한 예외가 게이샤 그리고 과테말라 라 조야. 그런데 지금은 과테말라 라 조야를 구할 수가 없다. 커피를 잘 모르던 시절에도 라 조야가 주던 그 균형감과 바디감을 잊을 수가 없는데, 애석하게도 지금은 어디서도 판매를 안한다. 아무튼 그 후 접한 리오 아리바는 오랜만에 만나는 단비처럼 입맛에 잘 맞는다. 나는 좀 원초적인 맛을 추구하는 것 같다. 균형적인 맛보다는 이렇게 색깔 분명한 원두가 입에 잘 맞는다. 리오 아리바는 온도에 따라 맛이 많이 차이가 난다. 막 내려서 식기전까지가 좋은 맛이고, 식은 후에는 전혀 다른 맛이 난다. 식기 전에 마시는 것을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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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로스팅한 캐냐 첼마. 좋게 말하면 균형감, 나쁘게 말하면 자기 색깔이 없다. 과일맛이 강하게 우러났으면 하는 아쉬움. 나에게는 그렇게 와 닿지 않는 원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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