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와츠 박스를 산 기념으로 그의 음반들을 쭉 들어보았다. EMI 시절 더블 포르테로 나온 가성비 최고의 음반을 제외하고는 그의 음악을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박스의 시대를 맞이하여 그의 박스가 가성비 만점의 박스로 재발매.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스 만듬새도 4만원도 안되는 박스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 오리지날 자켓에 시디 프링팅도 엘피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내지가 조금 부실 한 것 빼고는 영양만점이다. 반면에 아라우 박스는 조합하기 이를데 없는 시디 케이스부터 시작해서 오리지날 자켓을 모두 내지에 몰아넣은 것도 불만이지만, 시디 표면 프링팅이 죄다 엉망이다. 자켓 하나에 시디 한장을 넣어야 듣기도 편하고 관리하기도 편한데, 필립스 이 회사 애들은 무슨 생각으로 박스를 이따위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앙드레 와츠의 리스트만 들었던 나는 그가 연주하는 쇼팽이 궁금해서 쇼팽을 먼저들었다. 기대와는 달리 평이한 쇼팽. 앙드레 와츠를 건강한 음악이라고 하던데, 건강한 쇼팽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기교가 하늘에 닿아도 쇼팽의 병적인 섬세함을 담아내지 않으면 쇼팽은 쇼팽이 아닌 듯. 쇼팽 음악을 악보대로만 연주하면 얼마나 무미건조한가. 이반 모라벡이 음반에서 들려준 쇼팽은 쇼팽 음악의 전범이라고 생각한다. 루바토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가 처음이었고, 프레이징의 중요성을 알려준 것도 그였다. 섬세한 터치과 투명한 음색으로 연주한 그의 쇼팽은, 그 시대 쇼팽이 연주했음직한 낭만주의가 살아있다.
이런 실망은 별개로 리스트로 돌아오자 내가 기대했던 와츠의 모습이 되살아 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없는 톤과 음색은 그의 비범함을 보여준다. 핑거링을 넘어서는 피아노에 대한 통제력은 경의로울 정도.
80년대 도쿄 라이브 실황은 전혀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레파토리부터가 스카를라티 브람스 라벨 … 실황인데 그가 보여준 피아노의 톤과 음색은 어떤 면에서 스투디오 녹음을 능가한다. 장년의 와츠는 단순히 기교만으로 지금의 위치에 올라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순수하고 수수한 모습의 피아노 연주를 들려준다. 그런데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 것이 그 홀을 가득채운 그의 수수한 리리시즘이다.
오디오는 시공을 왕래하기 위한 장치이다. 녹음이란 시공을 봉인하는 것이며, 재생이란 시공을 해 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오노데라 코지
이 말을 정확하게 재현해주었다. 그날 그곳의 시공간을 내가 다시 풀어 듣는 것. 참 위대한 순간이고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모처럼 피아노만으로 밤을 새웠던 즐거운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