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었네.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우리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하는구나.
“자, 시온의 노래를 한 가락
우리에게 불러 보아라.”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시편 137, 1~4 가톨릭성경)
스페인 왕 펠리페 2세가 영국의 그 유명한 헨리8세의 딸, 메리 여왕과 결혼하려 영국을 방문 때 수행원 중 한명이 몬테였음. 이때 탈리스의 제자였던 버드는 이때 몬테와 교류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몬테 – 탈리스 – 버드, 이 세사람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가톨릭. 버드는 이때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추정하는데 이미 천재성이 드러나 18년이나 연상인 몬테가 관심있게 바라보았을 확률이 크다.
이후 영국 정치의 격랑속에서도 몬테와 버드의 교류는 지속된 것으로 보이고 가톨릭-국교회로 오락가락 하는 난장판 속에서 결국 국교회가 승리하고 가톨릭 수도원은 패쇄되고 신자들은 박해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국교회가 정식으로 국교로 인정 받으면서 수도원들이 패쇄되거나 파괴되는데, 이는 영국 종교음악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한다. 그것은 수도원이 단순한 종교시설을 넘어 음악과 교육의 본산이었기 때문.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치세동안 영국은 황금기를 구가하게 되지만, 가톨릭 신자들은 정치,경제,사회 거의 모든 분야에서 박해가 점점 심해진다. 버드도 점점 심해지는 박해를 피해 교외로 은신하게 된다.
이런 박해의 나날이 계속되던 1583년 몬테는 버드에게 편지를 보낸다. 당시 몬테의 나이는 62세 몬테, 버드는 44세. 노년의 작곡가가 장년의 후배 작곡가에게 보낸 편지. 후배작곡가를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이 묻어난 편지였음. 편지의 내용은 일반적인 편지와 달리 악보. 이 악보의 가사가 시편 137장 1~4절 내용. 시편의 내용을 빌려 은유적으로 국외 이주를 권한 것.
당시 몬테는 프라하 신성로마제국 궁정악장이었다. 게다가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로돌프 2세는 예술에 관심이 많은 군주였고 펠리페 2세와는 사촌지간. 몬테는 쉽게 말해 버드가 이주해 온다면 한 자리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럴만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Super Flumina Babylonis 바빌론 강가에 앉아 , PHILIPPE DE MONTE 1521년
몬테는 가사를 의도적으로 재배치 하는데, 2절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었네)을 4절 다음에 배치하여, 어서 이교도의 치하에서 고통받지 말고 예루살렘인 이곳으로 건너오라는 메세지를 던진다.
이 악보 서신을 받은 버드는 답장에 시편 137장의 4절만 사용하여 답장을 보낸다. 이것이 그 유명한 QUOMODO CANTABIMUS (MOTETTE),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버드는 이 답장 악보에서 4절만 사용하여 자기의 신앙과 심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온갖 압박과 협박속에서 굴하지 않았던 버드의 직설적이고 강직한 성격이 묻어난 것. 답장에 보낸 악보속에서 버드는 시편 137장의 4절만 가사로 만들어 곡을 붙인 것은 가톨릭 신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자 대답인 것.
같은 시편 내용을 가지고 두 대가는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몬테는 2절 내용을 강조함으서 이교도의 소굴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지만 버드는 4절만 인용함으로서 모국에서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그런 버드의 결연한 심정이 담겨 있기에 모테트중 한곡인 이 곡에서는 비장함과 더불어 슬픔이 묻어난다.
QUOMODO CANTABIMUS (MOTETTE) , WILLIAM BYRD 1539년
이상 내용이 7월당 풍월당에서 열린 튜더 왕조 시대의 음악 강의 ( 이준형 )중 몬테와 버드의 일화 부분임. 강의 내용을 성자와 대화를 통해 보완한 것임.
이 날 튜더 왕조 시대 강의 핵심은 탈리스 – 버드로 이어지는 영국 종교음악의 전통. 국교회로 넘어가면서 영국 종교음악의 전통은 단절되나 시피 하고 다운랜드를 마지막으로 꽃은 시든다. 이후에 누가 있을까 찾아보니 퍼셀.
영국 르네상스 시대의 마지막 화려한 불꽃. 이 시기의 강의 내용은 차후 보완예정임.
Philippe de Monte (1521 – 4 July 1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