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츠부르크의 미켈란젤리

1965년 8월 7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모차르테움

1965년이면 얼추 미켈란젤리의 나이가 마흔 다섯 무렵. 인생의 반을 넘게 살았고, 연주자로서 절정의 위치에서 서서히 내려오던 시기.

바흐-부조니 샤콘느 한곡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번으로 이루어진 40분 남짓의 음반이다. 이날 이곡만 연주 한 것은 아닐텐데, 아쉽게도 달랑 2곡만 음반에 담았다.

바흐-부조니 샤콘느 연주는 40년대 EMI 에서 이십대의 미켈란젤리가 녹음한 해석과 동일. 이것은 미켈란젤리 모든 연주를 관통하는 일관성이다. 이것은 미켈란젤리의 음악관이 경력 초창기부터 확고했다는 것과 동시에 그의 음악세계가 초창기부터 완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절제되고 엄격한 루바토, 투명하고 맑은 톤, 정확한 프레이징, 전체적인 구조을 중심에 두고 완성해가는 세세한 해석. EMI 에서 녹음한 젊은 날의 미켈란젤리의 연주는 이런 면에서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미켈란젤리의 음악관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남긴 아주 소중한 기록이다.

이 음반을 구입한 까닭도 EMI 음원에서 들었던 젊은 날의 미켈란젤리의 그 강철같은 해석이 그리웠기때문. 20대의 미켈란젤리의 해석은 날이 바짝 서 있는 칼과 같은 연주. 긴장감이 대단해서 곡의 후반부로 갈수록 곡의 장대함이 화려하게 되살아났다. 다만 40년대라는 시대적인 녹음환경을 감안하면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는 녹음이었다.

이번 오르페오의 65년 녹음은 아마 미켈란젤리 바흐 – 부조니 샤콘느 연주 중에서 음질적으로 최상일 것이다. 해석과 완성도는 미켈란젤리 어느 녹음을 들어봐도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미켈란젤리의 음악은 녹음실에서 편집과 반복연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녹음의 완성도만 있을 뿐 미켈란젤리의 어느 시기 어느 음반을 들어봐도 일관된 해석과 완성도가 존재한다. 이것은 미켈란젤리의 완벽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 플레트네프가 피아니즘의 절대성을 언급하며 라흐마니노프와 미켈란젤리를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 한 것도 이런 맥락이 아닐까 싶다.

어제 밤에 바흐 – 부조니 샤콘느 이 한곡을 반복해서 들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하나 하나 기초를 쌓아가는 벽돌공처럼, 으로 밀어부치는 이 피아니스트의 치밀하고 놀라운 기교와 해석에 경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아니스트로서 최절정에 서 있던 50년대 테스트먼트 녹음이 떠올랐다. 이 때의 미켈란젤리는 육체와 정신이 피아노와의 전쟁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극한에 다다른 기교는 신묘한 경지에 다다랐고, 일체의 틈과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해석은 완벽 그 자체. 더욱 놀라운 것은 일체의 편집과 가감이 없는 라이브 연주였다는 것.

그는 그런 피아니트스였다. 그런 피아니스트.

그가 몰고다닌 수많은 기행과 일화는 이야기 하지 않겠다. 그것은 신화를 더욱 신화로 만들어주는 양념에 불과하니. 진실은 이거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미켈란젤리는 오직 그 한사람 뿐이었다.

공사완료…

조립식인데 내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벽을 보면 알 수 있다. 뭐 그렇지만, 공사내내 감독을 아버지가 해주셔서, 사실상 아버지의 작품임. 그래서 모든 사이즈가 10%씩 감소. 천장이 3m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우울하게 한다 ㅡ.ㅡ

여기에 벽과 천장 편백 루바를 하고 조명 하나를 이케아로 바꾸고 바닥에 마루를 깔면 끝. 난방을 어떻게 할까 계속 고민중이다. 바닥난방을 하게 되면 탄소섬유시트 깔아야 해서 장판을 깔고, 바닥 난방을 포기하고 그냥 히터로 만족한다면 마루를 깔게 된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난방방법에 대해서 고민이 많음…

 

샤르팡티에를 듣는 밤…

요즘 도세의 샤르팡티에 음반들을 들으며 푹 빠져지낸다. 샤르팡티에의 음악이 나와 이렇게 잘 맞는 줄 몰랐다. 도세가 지휘한 모든 샤르팡티에 음반을 들으며 어느 한 장도 내 맘에 들지 않은 음반이 없었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 마음속으로부터 잔잔한 감동이 밀려온다. 사실 샤르팡티에가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간 잘 듣지 않았는데 그건 내가 무지해서 였고, 샤르팡티에는 진정한 거인 그 자체.

밤에 작은 불을 켜놓고 그의 음악을 듣는 이 호사로운 사치에 감사한다.

난 참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면 내가 샤르팡티에를 알 수도 그의 음악을 들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예술이라는 고귀한 아름다움이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현실. 예술이 배나온 돼지들의 전유물이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