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기독교는 시작부터 이단 시비가 끊이지 않았던 종교이다. 어느 종교나 이단이 있지만, 처녀에게 잉태되어 죽은 사람이 부활하였다고 믿는 이 종교는 시작부터가 다르다. 과학과 사실의 경계도 없었던 시절이지만 사람은 처녀에게 태어나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결코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종교는 이 완벽한 경험적 절대 사실을 완벽하게 부정하고 그것을 믿어야 하는 것을 강요한다. 때문에 자기 부정없이 이 종교를 믿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여기서 자기부정은 경험적 사실에 대한 자기부정이다. 아무리 무식하고 이해력이 없는 사람도 죽음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이 존재하고 죽음을 인지하는데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문제이겠는가.

따지고 보면 정파와 이단의 경계도 불분명하고 둘 다 사실 그 자체를 부정한다. 사실을 부정하는 현실 사이에서 옳고 그름의 차이는 소소해 보인다.

가톨릭의 경우 긴 역사를 통해 이단의 심각성과 독버섯과 같은 전파력을 알고 있기에 피를 두려워하지 않고 숙청해왔고, 현대에 들어서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활용 이단으로 판명되면 가차없이 파문이라는 칼을 휘두른다. 피는 보이지 않지만 이런 처분은 효과적이어서 개신교와 같은 이단의 폐해가 상대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나주의 윤율리아 같은 사기꾼이 여전히 설치고 있지만

어려서부터 사형제를 반대하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 신념에는 변함이 없지만, 나는 정명석은 사형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2002년 대학생 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개신교 이단중에서도 이정도로 미친 아니 인간 악마는 드물기 때문이데 요즘 유행하는 ‘나는 신이다’ 를 잠시 보며 다시 한번 이 생각이 틀리지 않았고, 오히려 죽이지 않아서 죽는 사람이 나타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지만 정명석을 죽이는 것은 마귀를 죽이는 것과 같은 구마에 가깝다. 정명석은 사람이 아니다.

기독교의 믿는다는 것 자체가 이단에 빠질 가능성이 포함된 태생적 위험성을 지니고 있기에 과학이라는 사실을 놓고 판단할 때 무신론자가 더 논리적이고 사회에 이롭다. 인간은 종교적 열정을 갖고 행할 때 더 철저한 악을 행한다는 파스칼의 말은 그때나 그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유효하다.

함석헌은 평생을 기독교 신자로 살았지만, 종교는 과학적 사실을 부정해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종교적 교리는 과학적 사실보다 아래있다는 것을 그는 고백하고 그것을 믿으면서도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초월적인 정신과 영적인 세계를 살았던 그지만, 그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기독교인은 이래야 한다는 현대적 의미의 선지자였다.

탈중앙집권적인 개신교 신자가 많은 한국은 이단이 살기 좋은 풍토가 조성되었다. 미국처럼. 자유롭다는 것은 그만큼 타락하기 좋은 것이다. 이단 뿐만이 아니라 대형교회 목사들의 타락을 봐도 자유는 달콤하지만, 결과는 독버섯과 같다. 겉만 화려할 뿐이지 죽어가는 믿음인 것.

독버섯처럼 퍼진 이 타락한 믿음이 사회 곳곳에 퍼져있다는 것이 놀랍다. 과학의 시대에 예수의 탄생과 부활을 믿는 것도 신기한데, 살아있는 하느님의 아들들이 설쳐대는 이 현실을 믿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가히 놀랍다. 그래서 정명석이 아직도 건재하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진실된 종교적 열정이 가득했다면 과거의 정의봉처럼 정명석을 쳐 죽였어야 했다.

이 땅의 믿음, 기독교의 믿음이라는 것이 결국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광기와 미신이 얼룩진 굿판만도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적인 욕망이 이글대는 정명석보다 더 무서운 것은 돈의 광기로 얼룩진 교회판이다. 돼지머리가 올려진 굿판보다 더럽고 추한 교회. 이단은 이렇게 교회의 타락을 먹고 살아난다. 그래서 정명석 같은 마귀가 아직도 건재하고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그치지 않는 것.

더 우울한 것은 이 것이다. 이 땅에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회개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아이들에게 종교적 열정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과 상식을 가르쳐야 한다. 믿음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당타이손 쇼팽 DG

당타이손이 쇼팽 콩쿨 우승하고 녹음한 DG 쇼팽 녹음을 듣고 있다.

이렇게 정직한 연주가 있구나.
잔재주 하나 없이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연주하는 듯한…

내 취향과는 별개로
좋은 연주라고 인정 할 수 밖에 없다.

쇼팽연주는 변칙적이고 감각적인 것이 나에게 더 맞지만,
이 연주는 취향과는 별개로 대단하다.

2020.12.30

나의 문어 선생님을 문어 대한 생태 관찰쯤으로 생각하고 봤다가 끝날 때 눈물 콧물 닦으며 밀려오는 경외감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주인공의 삶은 문어와의 만남이후 문어가 살아가는 다시마숲을 지키기 위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문어가 죽어 상어의 먹이가 되어 사라지기까지 인간적인 연민과 슬픔이 밀려오지만 결국 그 또한 자연의 일원으로 자연을 구성하고 그 자연을 위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위대한 순환의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간 수없이 다이빙하면서도 보지 못했던 그 생명을 품어 키워낸 다시마 숲을 보게 되고 어머니 자연을 느끼게 된다.

문어와의 교류에서 느끼고 배운 것도 적지 않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 운명에 대한 순명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그 숭고함이 자연의 순환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시간동안 반복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보이지 않는 그 많은 생명이 자연의 일부로 어머니 자연을 돌보고, 결국 어머니 품속으로 돌아간다.

채식을 하던 20대 초반 내 지난 날이 생각났다. 그 시절 어머니 자연에 품고 있던 내 경외감은 어디로 갔을까? 잊고 지내고 잃어버린 나를 생각하게 해주었다. 말마다 생각마다 습관적으로 내뱉던 그 많은 순간 순간이 나를 무디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때처럼 삶에 대한 치열함도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태어나고 싶어 태어나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생명과 죽음의 순환속에서 우리 모두의 삶은 저마다의 의미와 소명을 갖고 있다. 우리가 주체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는 착각에 휘말려 지구를 불바다로 만들고 있고, 코로나라는 역병도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결과.

세이모어 번스타인이 다가오는 죽음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운명에 순응하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순명은 그런 존재 본연의 모습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며, 인간은 지구라는 어머니 품속의 수많은 생명들의 순명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 살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생명의 희생속에서 일궈진 고귀한 가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