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생각 (8)

1. 벌써 가을이다. 가을에 태어났지만 난 가을이 싫다. 겨울은 더 싫고… 가을부터는 생명력이 소멸되는 계절이다. 빛나는 푸르름이 가득한 신록이 이제 점점 사라져가는 계절이다. 그래서 가을이 싫다. 점점 줄어드는 일사량에 나의 몸은 정직하게 반응한다. 더위보다는 추위가 좋지만, 여름의 세상 가득한 신록의 생명력은 그 어느 계절의 매력도 따라올 수 없다. 신록의 주인공, 나무가 나는 좋다. 말 할 수 없이 나무가 나는 좋다. 나무가 행복한 계절이 나도 좋다.

2. 서른이 넘어서면서 운동을 꾸준히 하는데, 일단 운동을 하지 않으면 몸이 아프니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 운동도 중독이 된다는 말처럼 컨디션도 안좋고 기운이 없는 날에도 일단 운동을 해서 땀을 빼면 한결 몸이 개운하다. 요즘 웨이트 트레이닝의 강도를 높이는 편인데, 근육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작은 운동량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나중에는 운동 강도를 높여주지 않으면 같은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지난 주부터 스쿼트 무게를 조금씩 늘려갔다. 100KG까지 올려봤는데, 어깨에 와 닿는 무게감이나 앉았을 때 운동량이 굉장한 편이다.

3. 요즘 다시 음악을 듣는다. 한 2년은 넘게 음악을 소홀히 했던 것 같은데, 그동안 음악과 떨어져 지낸 탓인지 내게 다가오는 선율이 처음 음악을 듣던 그때처럼 신선하다. 물론 그때의 열정과 순수함은 없지만. 고음악을 주로 듣다가 푸치니의 오페라를 듣는데, 마음이 잔잔한 비가 내리는 것 같다. 참 헨델의 메시아도 그렇게 좋은 곡인지 예전에는 미쳐 몰랐다.

짧은 생각 (7)

1. 나는 글을 쓸 때나 평소 말할 때도 영어나 어려운 한자말은 잘 사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될 수 있으면 우리말, 쉽고 간결하게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습관을 잡아가다 보니, 남들이 하는 말도 무심결에 집중하게 되는데, 텔레비전에 나오는 시장 아줌마들도 일상생활에서 습관처럼 굳어진 영어나  일본식 표현들을 많이 사용하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들온말(외래어)이 얼마나 비판없이(무비판적 -> 생각없이,비판없이가 바른 표현이다) 수용되었는지 알려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한마디씩 던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비군 훈련에 갔는데, 중대장님이 계속 ‘이빠이 이빠이’ 하기에, 중대장님이 되어서 ‘이빠이 이빠이가 뭐래요.’ 말한 적이 있다. 예비군 훈련장이니까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있었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이런 말 하기 참 어렵다.

2. 홍님 블로그 읽으면서 동감이 가는 것 중의 하나가, 흉부외과 같이 힘들고 어려운 과에 의사들이 지원하지 않는 현실이다. 노무현 정부의 실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지난 정권들부터 쌓여온 모순의 폭발처럼 보인다. 의사의 꽃이 외과라는데, 예전에는 공부잘하는 의사들이 외과를 갔다는데, 요즘은 성형외과나 안과에 몰리니 내가 보기에도 참 안타깝다. 싱가포르는 외과 개업의가 호텔처럼 이루어진 병원에서 고가의 의료기기들을 사용하고 그 사용료를 지불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개업의가 하기 어려운 수술들을 하는 것을 보며 참 좋은 제도라는 생각을 하였다. 당시 싱가포르 외과 의사가 우리나라 외과 수술 비용을 보더니 어이 없어 하던 표정이 생각이 난다.

나는 우리나라 의료정책이 약사들이나 개업의들 위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큰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들의 입장이 잘 반영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큰병이 나면 큰병원을 찾아야 하듯이 중요한 의료정책 또한 사소한 질병보다는 암과 같이 큰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향으로 흘러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감기 따위에 혜택받으려고 건강보험에 가입하고 꼬박꼬박 보험료 납부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힘들고 어려운 과의 전문의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 그 혜택이 직접적으로 환자에게 돌아온다고 생각한다. 홍님 지적대로 어려운 과에 지원하는 의사들에게 헌신과 노력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노력에 대한 보상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의사 본인에 대한 보상의 차원이 아니라 환자에게 돌아오는 가장 직접적인 혜택이라고 생각한다. 외과의사를 필리핀에서 수입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런 최악의 상황이 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3. 오래 살고, 건강하게 살려면 멀리해야 되는 것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 으뜸으로 꼽을 만한 것이 바이크다. 바이크 타면서 다치지 않았다면 그건 거의 거짓말에 가깝고, 얼마나 적게 다치느냐가 바이크 운전의 관건이다. 바이크는 과부제조기라는 별명도 있는데, 모두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바이크를 멀리하지 못하는 것은 그 매력이 꼭 여자와 비슷하다. 어떤 연구 결과는 바이크를 탈 때의 쾌감이 남성이 성관계 중 사정할 때보다 더 크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바꿔 말하면 여자보다 더 좋다는 말도 될수도 있다.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살려면 바이크 타면 안 된다는 생각은 하는데, 지나가는 바이크만 보면 눈이 돌아간다. 미인을 보면 눈이 돌아가는 것처럼.

이것도 병이 분명하다. 심각한 병이다.

4. 요즘은 인터넷을 거의 못하다 보니, 노트북 워드프로세서에 글을 작성해두었다가 인터넷이 될 때 글을 올린다. 그러다보니 답글 달기가 자연스럽게 늦어진다.

5.  내 자전거를 누가 훔쳐갔다. 그래서 버스타고 다니는데, 괴롭다. ㅡ.ㅡ

짧은 생각 (6)

1.  복싱처럼 땀을 많이 흘리는 운동은 해본 적이 없어서, 여름에 땀을 많이 흘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요즘 깨닫고 있다. 웨이트 트레이닝 같은 운동은 여름에도 2시간은 가뿐한데, 복싱은 링에 올라가서 3라운드 뛰고 나면 손이 떨려서 주먹이 안 나간다. 더위가 무섭다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실감한다. 나름 더위에 강한 편이라 생각했는데, 힘든 운동해보니 내가 얼마나 편히 살았는지 알겠다.


 


2.  연애란 싸우기도 하고 미워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에로스 적인 사랑이라면 싸우기도 해보고 미워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도 없는 자비로 이루어진 사랑은 인류를 사랑하는 박애에 가깝지 않나 싶다.


 


3.  개를 키우면서 이런 저런 생각도 많고 고생도 많지만, 개 때문에 우는 경우도 생긴다. 내가 우리 두리를 데리고 산지 7년이 되어가는데, 어릴적 모습은 기억이 없고 늙어가는 지금의 모습만 내 기억속에 남은 것 같아서, 잠시 울컥털을 깎아주었는데 털이 없으니 더욱 늙어보인다.


 


4.  요즘처럼 기독교가 사람들의 중심에서 회자되는 경우도 드문 것 같은데, 그 내용이 유쾌하지 못한 것이어서 섭섭하다. 하지만 언제고 터질 것이 터진 경우라고 생각한다. 입으로만 예수를 외치고 살아왔으니 좋은 일을 해도 욕을 먹는다. 아프칸에 간 사람들은 적어도 순수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을 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곳에 지금 봉사하는 단체들이 철수하면 그곳의 아이들과 환자들은 누가 돌봐줄까. 남겨진 자도 떠나는 자도 슬픈 현실이다.


 


5.  기독교의 선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비난하는데, 선교의 정확한 뜻을 알고 기독교를 비판하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예수 믿으세요의 선교는 구약에 나온 선교이고, 오늘 의 선교는 희생을 의미한다. 예수를 믿던 안믿던,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 내 도움을 주는 것이 선교이다.

그 사람이 예수를 믿던 안믿던 그건 그 사람의 선택이고, 배고픈 형제에게 빵을 나눠주고, 아픈 자매에게 약을 건네주는 것이 선교. 어찌되었든 궁극적으로는 예수를 믿게하려는 목적은 똑같지 않느냐 묻는 사람도 있는데, 결과는 사람의 뜻이 아니다. 그건 누구도 모르는 하늘의 뜻에 가깝지 않나 싶다. 선교는 결과를 바라고 성취하는 행위가 아니라, 지금 내 도움이 필요한 곳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새 언약을 들고 오신 예수님의 뜻이다
.

바리새인들의 행위가 선교가 아니라,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위가 선교다. 오늘 날의 기독교에서의 선교는 단순한 종교적 포교행위를 넘어선다. 기독교에 있어서 선교는 어제의 단순한 포교행위가 아니라, 내 양심이 낮은 곳에서 아프고 힘든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

아프칸에 간 사람들이 단순히 예수 믿으세요 전도하러 간 사람들이라고 매도하면 할 말이 없다. 잡혀간 사람중에는 팔이 잘린 아이를 우리나라에 데려와 치료해준 사람도 있고, 그곳에서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도 있다. 선교하러갔다고 그 행위를 단순히 종교적 포교행위로 한정짓고 그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몰이해와 기독교의 부패가 나은 복합적 산물이다
.

선교는 양심에 귀를 귀울리는 모든 행위를 뜻한다. 왜 아프칸에 갔느냐고 묻지 말아줬으면 한다. 그 사람들에게는 그곳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을 뿐이다.